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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18. 2019

지킬의 가면을 쓴 하이드

우리 시대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

지킬의 가면을 쓴 하이드     


연일 뉴스에서는 성과 관련된 단어들만 난무하고 술자리에서 화두 또한 성이 지배한다. 

폭력적인 성과 동의 받지 않은 촬영과 유포, 성을 통한 접대 등이 언론 매체간 경쟁적인 보도로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들은 성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언론은 독자와 시청자를 끌어올 절호의 기회로 여기는 분위기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관심 있는 소재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이미 간파하고 있다. 

유교적인 전통에서 엄숙주의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성에 대한 담론은 금기시 되어왔다. 하지만 그 장막을 살짝만 거둬내면 자극적인 성적 쾌락을 찾고 탐닉하는 이중적 태도와 심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을 경쟁이 치열한 미디어 산업이 놓칠 리 없다.     


우리 사회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질타하길 기대했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 

쏟아지는 기사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는 성과 관련된 사건들이 상위에 오르고 가해자를 지탄하면서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찾는다. 


참 묘한 이중성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비단 성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내로남불’,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사람들의 가치 기준은 자신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 기준에서 판단하고 그 기준에서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영국 언론인 폴 존슨이 쓴 '지식인의 두 얼굴'에 의하면,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대표작 '에밀'에서 보여주듯 양육에 관한 교육이론으로 교육철학의 한 획을 그었다는 예찬을 받지만 막상 자기 자식들은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 

여성 해방의 주창자로 알려진 헨리크 입센은 개인적으로 여성 해방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외려 여성은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도 시류를 따라 출세하기 위해 쓴 글이었다는 것이다. 

노동해방을 부르짖었던 카를 마르크스는 정작 자신의 가정부에게 한 푼의 임금도 주지 않고 45년간이나 착취했으며,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면서도 여성과의 교제를 사회악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고 마광수 교수가 쓴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읽기’(2013)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문학마저 도덕률의 틀에 갇힌 사회에서 오히려 위선이 판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근엄한 척하는 지식인들이 뒤에서는 ‘호박씨를 더 잘 깐다’는 얘기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에 맞는 가면은 강요받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는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이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말한다. 그 가면이 영원히 그를 감싸고 있기도 한다. 

어느 순간 가면이 나인지, 가면 속의 인물이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단지 가면마다 두께가 달라 그 안의 본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때도 있지만 너무 두꺼워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때도 있다. 물론 가면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의 가면 안에서 자행되는 허위와 위선은 범죄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1862년 파리의 살롱에 전시하기 위해 출품된 누드화 하나가 파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그 그림의 모델은 한때 가난한 모델이었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코르티잔(고급 창부)이 된 여인 빅토린이었다. 당당하면서도 뭔가 불편한 눈길을 주는 그림 속의 그녀는 목에 두른 리본과 팔찌 외에는 아무 것도 두르지 않고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관객의 그녀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그녀는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당신을 위해 나의 온 몸을 드릴게요 절 찾아와주세요”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그녀를 찾는 고객의 선물인 듯하다. 그리고 구겨진 침대의 커버에서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치른 듯 헝클어져 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의 발 아래로 의자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조그만 검은 고양이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은어로 검은 암고양이는 여성의 성기를 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심사하던 당시의 사회 지도층의 인사들은 이러한 그녀의 발칙한 도발이 불편하기만 했다. 신성하고 엄숙해야 할 예술계에서 춘화 같은 작품은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이 그림을 그린 마네는 모든 언론과 사람들로부터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의 이러한 도발이 있기 전까지 프랑스 살롱에 전시되는 누드 작품은 대부분 신화와 역사를 소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올랭피아>라는 이름으로 출품된 이 작품은 신화 속의 신이나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닌 당시의 고급 창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또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각지고 투박한 얼굴이다. 그러한 그녀에게 고객으로부터 온 꽃다발을 전달해 주는 흑인 여성은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주인공의 미모에 대비되도록 늙거나 추한 얼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네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에밀 졸라(Zola)를 위시한 소수의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모더니티’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고 칭찬하며 옹호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고상함을 전면에 내세운 비평가들은 마네가 그리고자 했던 파리의 어둡고 추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그림을 통해 제2 제정의 가치들이 위선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표현했음에도 신문들은 연이어 그의 그림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일관했고, “노란 똥배가 나온 오달리스크”라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심지어는 그가 완전히 미쳤다고까지 말하곤 했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파리에 거주하는 남성들의 밖에서 고상한 척 하며 밤이면 퇴폐적인 향락에 빠져 사는 그런 위선과 이중적 성의식을 폭로하려 했지만 그간의 아카데미파가 주축으로 형성된 미술의 전통을 파괴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카데미파의 최고의 작가로 알려진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작품이나 윌리엄 부그로의 작품에서도 대부분 누드를 등장시키지만 그들은 현실의 여성이 아닌 역사와 신화 속의 인물들이었다. 특히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의 모델도 역시 창부였다. 그녀의 자세는 올랭피아보다도 더 관능적이고 노골적이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하지만 누드 위로 아기 천사를 그려 넣음으로써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었다. 

바로 그리스 신화의 비너스로 변신한 것이다. 마음속에선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포르노그라피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선정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다. 


그림 속 누드모델은 카바넬에게서 현실이 아닌 신화 속 이야기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이를 보고 성적 상상을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기 천사들만 없다면 남자들을 유혹하고도 남을 정도로 에로틱하면서도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음탕하기까지 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고전적인 회화의 모티브인 비너스를 암시하면서 모든 선정성 시비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주제인 누드화는 선정성 시비만 없다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정성 시비는 아카데미파의 화가들과 언론에 의해 더욱 증폭되곤 했다. 

그 시비를 피하기 위해선 신화나 역사에서 찾아야 했다. 특히 사랑과 미의 여신이었던 비너스야말로 그 시대 작가들이 흔히 그렸던 주제이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역시 신화를 주제로 한 <비너스의 탄생>의 탄생을 그린 누드화를 내놓았다. 그의 그림에서 여신은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드러내 놓고 있다. 부그로의 그림에서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하는 순간이 아닌 조개껍질을 타고 키프로스로 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비너스의 탄생'

이 그림이 신화의 한 장면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사랑의 여신의 전령인 푸토가 비너스의 탄생을 알리며 기뻐하는 모습과 포세이돈의 아들인 트리톤들이 고둥을 불며 모든 신들에게 비너스의 탄생을 알리고 젊고 아름다운 네레이드들이 질투어린 시선으로 여신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마네는 도발적인 그림을 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마네의 도발은 처음이 아니었다. 올랭피아를 그리기 2년 전 그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작품을 내놓아 구설수에 오른 경력이 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그런데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에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가 아름답지만 왠지 수상쩍은 그림을 내놓은 적이 있다.     

티치아노의 그림에는 한가로운 교외 풍경을 배경으로 남자 둘돠 여자 둘이 모여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류트를 연주하고 있고 그의 앞에 있는 누드의 여인은 피리를 들고 있다. 언뜻 보면 아는 사람들끼리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운 피크닉을 즐기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남자 둘은 서로 잘 아는 듯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피리를 든 여인은 그 남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여인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석관에 물을 쏟고 있다. 


두 남자는 그 시대의 옷을 입고 있는데 꽤 신분이 높은 상류층의 남자들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에 여자들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 여자들은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림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더하기 위해 존재한다. 바로 절제와 사랑이다.      


여자들은 부드러운 빛을 받고 있으며 그림 전체를 밝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남자의 등을 향해 있는 여자가 들고 있는 악기는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 왼쪽에서 물을 쏟아 붓고 있는 여자는 ‘절제’를 상징하고 있다. 


프랑스 속담에 ‘다른 사람의 와인에 물 붓기(To put water in one’s wine)’라는 속담이 있다. 이 그림에서 물을 붓는 여자를 등장시킨 것은 흥청망청하는 사람들에게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장면은 16세기 영국의 ‘아르카디아(Arcadia)’란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 시에서는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목동에게 들려주는 젊은 귀족을 말하고 있다. 그림 속 노을이 질 무렵의 편안함과 시적인 이미지가 조화된 이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전원음악회'

바로 이러한 <전원 음악회>에서의 영감은 마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마네는 과거 시에서 영감을 얻은 티치아노와 달리 그 당시 프랑스의 위선적인 모습과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 세력에 대한 발칙한 도발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화단의 이단아라고 불리는 카라바지오도 있다. 그도 역시 성모마리아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은 당시 충분히 분란을 일으킬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침울한 그림에서 매춘부를 모델로 삼아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을 묘사한다. 동정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보는 가운데 숨진 채 누워 있다. 카라바지오는 물에 빠져죽은 한 매춘부의 시신을 놓고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벌거벗은 맨발에 피부색은 검푸르고 온 몸이 물에 불어 있다.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고 손 또한 펴진 채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미켈란젤로 카라바지오, '성모 마리아의 죽음'

속되다고 모두가 얘기하는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승화시킨 카라바지오의 이 작품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카라바지오는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 했다. 성과 속이 따로 없다는 의미였다. 성 안에 속이 있고 속은 그 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회적 체면, 엄숙함은 그저 화려한 외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투를 벗었을 때 그다지 놀랄 일도 없지만 사람들은 벗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 그 외투 안의 왜소하고 추한 몰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외투는 자신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을 가려주고 포장해주는...

그 포장된 권위의 외투를 입고 그들은 여전히 TV 카메라 앞에 서고 대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얘기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아닌 더덕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읽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치관을 얘기하고, 인생의 길을 얘기하고, 윤리를 강조하는 그들의 밤의 풍경은 너무도 난잡해 입에 오르내리기도 민망할 때가 많다. 엄숙주의, 도덕주의에 가려진 욕망의 실체는 외투 안 음습한 곳에서 꿈틀대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는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는 그 실체를 보기도 하지만 한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진실이 얼마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관계의 중심에서 자신을 정점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하는지, 자선이란 이름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의 가면을 고발한 한 사람이 있었다. 

시인 윤동주를 진정한 모습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사람. 

윤동주의 작품 전체에 조용히 흐르는 그 ‘부끄러움’을 세상에 내 놓은 사람.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 시를 시의 언어로 분석한 사람. 

바로 마광수였다. 

‘즐거운 사라’로 외설스럽다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외면 받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외투 안에 감춰두고 있던 그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엄숙주의와 도덕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내부에서 온갖 냄새를 풍기고 있던 사회에서 비난과 편경에 시달려 왔던 그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며 남긴 시집만이 우리에게 못다한 말을 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은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였다. 


고산_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 건축공학(학사), 환경대학원(석사), 공과대학 건축대학원(박사),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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