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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Mar 18. 2019

저 계단의 끝에는 행복이 있을까?

가난과 실패가 대를 이어 지배하는 구조, 당혹감과 어색함으로 가득한 세상

저 계단의 끝에는 행복이 있을까?     


초등학교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신학기가 시작되면 연례행사처럼 하던 일이 있었다. 일명 호구조사라는 것이다. 집에 TV 있는 사람 손들어봐! 냉장고 있는 사람은? 

이쯤 되면 아이들은 눈가 손을 들고 누가 들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 가난한 집이 어린 자존심을 짓이기고 있을 때, 어느새 아이들 따라 손을 든 나. 

눈치없이 뒤에 있던 친구는 “너 네 집에 냉장고랑 TV없잖아!” 그러면 고개는 이내 책상 밑으로 내려가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던 기억. 

부모의 학력을 물을 때쯤이면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 눈가가 촉촉해진다. 어린 나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했던 그 시절의 기억은 끔찍하기만 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고 친구들 앞에서 탁배기 한잔씩 돌리던 아버지. 이젠 그 개천에서 용 된 사람 잡았다가는 개천에 같이 빠진다는 씁쓸한 농담마저 돈다. 소위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그 탁배기를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든다.    

  

미국의 PBC에서 다양한 캐릭터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세사미 스트리트’라는 미국의 어린이 TV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뽀뽀뽀’의 원조격인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모든 취학 전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학습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제작진의 의도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미국 PBC방송의 세사미 스트리트

그런데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자 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 시절 집에 TV가 있는 아이들은 교육적 효과를 보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 효과가 미미하거나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경제 수준이 프로그램의 시청 빈도수와 비례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력은 교육의 차이를 낳고 이는 다시 사회적 성공 가능성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더 지속 가능하다는 것. 결국 부익부빈익빈의 재생산의 구조가 고착되는 것이다.     

도미에, <빨래하는 사람>


도미에의 작품을 보다보면 어떤 이에겐 희망이 보이고, 또 어떤 이에겐 지독한 삶의 절망이 느껴질 것이다.

엄마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들의 발걸음은 너무도 무겁게 느껴진다. 

엄마는 부잣집 빨래를 하느라 손이 붉게 퉁퉁 부풀어 올라 있다. 그런 엄마를 온종일 기다린 예닐곱 살 딸을 그린 ‘빨래하는 사람’이란 제목의 도미에의 작품이다. 


이들을 따뜻한 금빛으로 에워싸여 있다. 멀리 보이는 센 강변 아파트는 황혼의 태양이 따뜻한 빛이 비치고 있고 강은 그 빛을 반사하고 있다. 


자기 머리통만한 빨래방망이를 든 아이의 발걸음은 힘이 있다. 

엄마의 양손에는 아이와 빨래바구니가 들려있다. 

무거운 짐인 동시에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포근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좋은 내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굽은 등은 그녀의 고된 노동의 하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눈과 코를 잃은 그녀는 대신 ‘그들’이 되었다. 세탁부로서의 그들, 일하는 여성으로서 그들, 그리고 미래가 없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지금 우리 앞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단한 삶의 계단을 오르고 있다.

도미에의 그림에는 오늘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무섭고 쓸쓸한 일이다. 


도미에는 이전 작품에도 역사의 한 복판에서 민중의 증인이 되어 그들의 삶을 선명하고 당당하게 그려냈다. 그의 생생한 그림은 시대의 아픔을 뛰어넘어 절망의 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라고 외친다. 물론 이러한 외침이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정의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의 문제도 아니다. 

물론 도미에는 말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가난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의 자식마저 어린 나이에 잃었다. 권력자의 권위에 도전하다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본 것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무엇이 작가를 캔버스 앞으로 이끌었을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전혀 다른 의문을 갖게 된다. 눈, 코, 입이 사라진 얼굴, 그럼으로 인해 표정을 잃은 모녀의 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얼굴 어디에도 윤곽선이 뭉개져있고 형태를 가늠할 명확한 선이 없다. 그들의 삶을 그린 것일까? 누군가를 특징지을 얼굴이 없다는 것은 이름마저 상실케 한다. 그저 여성 노동자, 혹은 세탁부로 존재할 뿐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1863년 경 파리의 풍경은 기대에 들떠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실이 서서히 나타나고 근대 자본주의가 자라잡고 있었다. 

레이튼이 그린 당시 파리의 밤풍경

도시화는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겉으로 보이는 도시는 화려했지만 실상은 이와 달랐다. 산업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간에는 명확한 계급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했고, 하녀나 공장 직공, 가게 점원으로 있으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센강에 세탁선이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아마도 엄마는 그 세탁선에서 일감을 받아 일을 했을 것이다. 산업사회의 격랑에 떠밀려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새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 척박하고, 세상은 너무 냉혹했으며, 사회의 변화는 인간 의식의 변화보다 빨랐다. 그 속에서 개인은 점점 지워져갔다. 

그림 속 모녀에게는 희망을 꿈꾸게 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도미에는 그림을 통해 그 꿈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위선과 허무, 좌절, 빈곤, 거짓에 찌든 삶의 한 가운데 내몰려 있다. 가난과 실패가 대를 이어 지배하는 구조, 당혹감과 어색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화려한 조명아래 파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시절, 뒷골목 냄새나는 풍경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미래를 꿈꾸지 말라고 강요받고 있었고, 도미에는 그들의 고개 숙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미래가 없으니 이름도 없다. 이름을 특정 지을 눈, 코, 입마저 사라졌다.     


개인은 이제 익명성으로만 존재한다. 그의 <다리 위의 여인과 아이>는 익명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도미에, <다리 위의 여인과 아이>

   

어두운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아이의 손은 잡은 엄마는 빈 바구니를 들고 있다. 

세탁부의 그녀처럼 고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다. 배경 건물의 실루엣은 얼핏 어두운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다. 지친 발걸음의 엄마와 아이는 빛을 등지고 걷고 있다. 행복의 빛은 그녀의 앞에 놓이지 못하고 있다. 


그림자를 안고 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은 세탁부에서 흔적이라도 남겨둔 것에 비하면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더 강렬해 보인다. 

눈, 코, 입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세탁부에서 계단을 오르면 행복이 보일까 기대하지만 이들이 건너는 다리에는 어떤 행복의 암시도 없다. 


황금빛 노을도 없고 오르는 계단도 없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이 암울함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세탁부>와 <계단 위의 여인과 아이>에서 구분되는 두 세계를 본다. 

<세탁부>에서 먼 배경으로 센강의 풍경을 담고 있는 황금빛 아파트와 어린 아이와 힘든 계단으로 이루어진 빈민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다리 위의 여인과 아이>에서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불 꺼진 아파트의 모습과 달빛을 맞으며 힘든 가족을 집으로 이끄는 다리라는 이질적인 모습이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명암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최고의 시대이지만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이면서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의 시대이면서 불신의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면서 어두움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 모두 천국을 향했고, 우리 모두 정반대 방향의 지옥을 향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우리가 살아가는 대도시의 명암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우리 시대가 지닌 가족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또한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는 동정 없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이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정리되어 있다.      

'두 도시 이야기'의 배경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시기이다. 

계급간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귀족 사회는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심화되던 때다. 평민들에 대한 횡포는 심화되고 파리 시민들의 삶은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그런 절망의 시기를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 산업혁명이었다.

사회는 번영하지만 그 번영의 이면에 커져가는 실업 문제, 빈부격차와 소득 불평등, 공장 노동자들의 처참한 근로 여건과 주거 환경 등으로 도시 내부는 심각하게 병들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인식하고 비판하는 것이 디킨스만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에서 비판적인 지식인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도미에, <어머니>


도미에 역시 이러한 비판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고발방식은 그들의 잃어버린 이름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그가 세탁부에 앞서 그린 어머니란 작품을 보면 그 시대의 보편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얼굴이 없는 어머니, 얼굴 없는 아이들에게 이름은 없다. 

그는 당시 이름을 잃어야만 했던 암울한 역사적인 순간을 표현했다. 어머니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가난한 자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름을 가질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개인을 구분하고 그에게 개인으로서의 권리도 부여한다. 

익명성이라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이름을 박탈당한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꽃 같은 존재. 


모든 존재에 이름을 붙여 존재의 본질을 밝혀주는 것이 본질을 좀 더 구체화시켜주는 것이다. 도미에게 그 이름은 얼굴이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그려준다는 것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선물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미에는 그림을 통해 그 꿈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위선과 허무, 좌절, 빈곤, 거짓에 찌든 삶의 한 가운데 내 몰려 있다. 가난과 실패가 대를 이어 지배하는 구조, 당혹감과 어색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

무엇이 이들이 꿈꾸는 미래마저 망상으로 만드는 것일까?     

나눠야 할 파이가 작아서일까? 그렇다면 파이가 커지면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사람들은 생각이 멈추게 된다. 파이가 커지려면 더 많은 산업화와 개발을 참아내야 한단 말인가? 


문제는 발전의 과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독점되어버렸을 때다. 분배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박탈감과 자괴감은 적대감으로 변질된다. 


내가 일해 모은 부를 왜 세금이란 명목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해? 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성장이 우선이야 분배가 우선이냐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가 누려야 할 기본권의 문제이다. 그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기본권을 제한 받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의 '승자독식' 상황이 심화되는 형태로 진행된다면 성장 우선 정책은 출발선부터 불공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도미에의 ‘세탁부’를 마주하다보면 가슴이 아리고 숨이 막힌다. 

어린 딸은 돌봐줄 사람이 없어 엄마가 일하는 내내 무료하게 엄마 곁에서 힘겨운 빨래가 끝나길 기다린다. 그 부잣집 빨래가 이들 모녀의 한 끼 밥 밖에 되지 않지만 딸은 엄마의 손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든든하고 따뜻하다.      


모녀에겐 오르는 계단의 끝엔 행복이 있을까. 


봄은 왔지만 이들에겐 아직 봄이 아니다. 빨래를 하는 강물은 봄이 왔지만 아직까지는 덜 풀려 손이 붉게 퉁퉁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일을 해도 형편이 나아질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아무리 배경에 희망의 색을 입히지만 그들에겐 오늘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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