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작가 빅토르 위고는 골목을 ‘사회적인 작품’이고 ‘전통을 겪은 세대의 유산’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골목이란 단순한 길이나 집과 집 사이의 빈 공간의 의미 이상이다. 그런데 개발이라는 이유로 너무 손쉽게 허물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컸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대표작마다 골목의 생생한 풍경을 즐겨 담았다.
오늘날 위고가 말한 유산은 사람들에겐 추억이 된다. 그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골목을 누비고, 낯익은 골목을 사진에 담아보며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가를 새삼 느낀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의문이 일기도 한다. 잃어버린 정서나 마음의 따뜻함을 회복하는데 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단 말인가? 왜 잃어버린 것에 마음 아파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은 아니다. 모르고 버린 소중한 무언가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다시 찾아야 할 문화 중 골목길이 최우선 순위에 놓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현대 산업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소통을 잃어가고 있다. ‘소통 없음’의 반대어는 아마도 공감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시인 정현종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두 줄짜리 시 ‘섬’이 생각났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시를 읽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하겠지만, 나는 이 시를 ‘현대인들 사이의 공감’이라고 읽는다. 세상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소통과 공감의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감의 장이 더 간절해진다.
물론 사람들의 공감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그 속도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데 1초면 된다. 시대에 따라 공감하거나 반응하는 속도가 LTE 급으로 변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 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변화하던 사람들은 공통으로 자신의 세대에 맞는 나름의 섬들이 있다. 그 모든 세대와 성별을 아우르는 섬이 바로 골목길이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내가 연세대 어학당과 서울대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다 보면 항상 들리던 노래가 있었다.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이다. 이 노래는 한국 사람들에게 골목길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려준다.
골목길 접어들 땐 /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 말없이 바라보았지 / ...
노래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골목길의 추억을 불러내고 있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의 마음 한구석엔 이렇게 골목길의 아련한 추억 하나쯤은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 골목길은 사람의 추억과 유년기의 향수,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어느 날 운명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가슴 떨리는 기쁨과 슬픔의 공간이 골목이다. 가끔은 사랑하는 남녀의 은밀한 공간이 된다. 물론 그러다 들켜 혼찌검 나는 그런 공간이기도 하다.
로미오가 줄리엣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듯 남녀의 사람이 익어가는 공간이 바로 골목길이어서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유난히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에게 골목길은 추억의 공간으로, 혹은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혹은 회사나 공장에서 돌아와 가족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서울의 대표적인 삶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간직하고 있던 골목길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마당과 골목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주차장과 도로가 들어섰다.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이나 사람들 사이의 공감이나 다양성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편리함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도시의 살아 있는 증거는 잃어가고 있다. 도시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역사는 생명력이다. 그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이 바로 골목이었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도 포근하게 받아주던 공간, 골목길. 그 골목길에 들어서면 현대인은 치열한 사회라는 조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간직한 도시들은 골목길에 도시의 숨결을 심는다.
내가 다녀본 유럽이나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은 그들 나름의 개성과 오랜 세월 녹아든 세월의 흔적이 살아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는 그곳을 다녀온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카탈루냐 광장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람블라스 거리는 바르셀로나 항구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길’이라고 표현하며 좋아했다고 하는 거리다. 길 양옆으로 플라타너스가 늘어섰고, 주변엔 꽃집과 액세서리 가게, 엽서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 카페들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유럽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거리 중 하나인 이곳은 현지인이나 이방인 모두 걷는 것만으로도 새삼 행복을 느끼는 곳이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이 도시의 동맥과도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카를교서 만나면 누구나 ‘프라하의 연인’이 되는 ‘빨간 뾰족지붕의 도시’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골목길에서도 그 흔적의 소중함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아르누보 양식에 이르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프라하의 건축박물관’으로 불린다. 1,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광장은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화형과 ‘프라하 시민운동’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다. 지금도 동상 아래에는 ‘진실을 사랑하고 말하고 지키라’는 얀 후스의 말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들 도시의 누구나 기념품 하나쯤 갖고 있는 파리 에펠탑이나 고대 화려한 역사를 말하는 로마 콜로세움처럼 웅장한 건축물은 아닐지라도 골목길만이 가진 소소하면서도 자잘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내뿜고 있다.
전후 복구로 자칫 그 모습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던 일본 도쿄 가구라자카의 경우도 본래의 생명력을 잘 지켜오고 있다. 이곳은 이미 수많은 골목을 개발이라는 괴물에게 내어준 서울에 시사하는 것이 많다.
가구라자카는 도쿄 신주쿠구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길이 700m짜리 거리다. 건물 뒤편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400여 년 전 길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일본의 여느 번화가와 달리 가구라자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서 에도(현재의 도쿄)로 옮겨왔을 때 조성된 마을로 당시 시대의 느낌이 잘 살아 있다. 한동안 개발에 밀려 슬럼화하는 등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오히려 개발에서 밀려난 이곳이 빌딩 숲이 즐비한 도심과 차별화해 그들의 정서를 유지해주는 도쿄의 대표적 문화거점 거리가 됐다.
서울의 골목길 또한 이들 도시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울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오늘날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골목길을 만들 수 있다. 골목길이 가진 한국인만의 친숙함, 그리고 아련함이 있는 따뜻함을 살려낸다면 외국의 그 어떤 도시의 자랑거리 못지않은 문화와 역사 도시로 발전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여러 전문가도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바로 현대적 편의성을 가미하는 골목길 문화의 회복이다. 기능 위주의 개발에 밀려 골목길을 단순히 ‘낙후한 것’으로 치부됐다면 지금이라도 골목길만이 가질 수 있는 친숙함과 따뜻함을 살려 문화 중심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이러한 골목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늦기 전에 남아 있는 골목길의 가치와 의미를 찾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누비던 개구쟁이 시절의 추억과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 가득한 낭만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높게만 느껴지던 구불구불한 길에서의 오래된 기억, 이제 이것들을 들춰내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 있다.
어쩌면 불편하고 지저분해서 눈길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런 것조차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삶의 흔적들이 나타나게 된다.
보는 시각이 달라지면 인식도 달라진다. 그러한 변화로 골목은 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을 집과 집을 이어주는 사적인 공간이라도 낯선 사람들을 반기는 공간이 될 것이다. 공감하고 서로 보듬어 안는 화합이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개발이라는 거센 광풍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어렵게 지켜낸 골목이 사람들이 모두의 이웃이 된다.
모두가 이웃으로 만드는 편안함이 그곳에 있다. 사람들에게 그 편안함을 주는 것은 소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네온과 열을 맞춘 빌딩 숲, 틀로 찍어낸 듯한 대로에서 벗어나 삶의 소소한 숨결과 여유를 간직한 곳이 골목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골목을 단순히 보존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누구나 느끼고 싶은 골목길은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처음 정도전이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골목 골목마다 그 시대의 정신이 스며들기를 원했을 것이다. 시대 정신은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삶에 대한 태도이다.
멀리 프랑스를 보더라도 문호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끊임없이 파리의 뒷골목을 이야기한 이유는 하나다. 당시를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려 했기 때문이다.
골목길은 사회적인 작품이며, 전통을 지켜온 사람들의 기록이다. 또한, 이들이 미래에 전해주고자 남겨놓은 유산인 동시에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물이다. 그 유산을 지키면서 그 속에 녹아 있는 보통 사람들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
골목을 한국의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일은 한국의 정서를 일깨우는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방문객들에게 네온으로 가득한 깨끗하고 반듯한 강남의 어느 거리만을 추천해 왔다. 혹은 잘 다듬어진 경복궁이나 창경궁을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소개한다. 한국인들이 보여주려 하는 것은 잘 정돈된 도시 이미지나 화려한 유물이다.
그러면서 “냄새나고 쓰레기가 뒹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골목길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고 한다. 그들 눈엔 골목길은 감추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진정한 모습이나 삶의 흔적은 강남 빌딩 숲이나 경복궁의 화려함 속에 있지 않다. 빌딩과 화려한 유적은 다른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실제로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이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 앞에 이러한 세월의 흔적을 담은 골목길은 시야로부터 가려져 있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길을 유도하는 것은 도심의 현대적 이미지와 화려한 네온사인 밑이다.
그러다 보니 서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와이파이나, 현대식 고층 건물, 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었다는 고속열차와 같은 현대적인 서울만을 이야기한다.
편리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고, 최첨단으로 무장한 서울에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발견을 기다리는 최고의 골목길과 갤러리와 문화공간, 삶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순수한 또 다른 공간들이 숨겨져 있음에도 이들은 지금까지 서울의 모습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아왔다.
서울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은 이 도시가 방콕, 오사카, 상하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특색 없는 도시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저 그런 도시, 규모만 큰 도시라는 인상을 받고 떠날 것이다.
나는 처음 서울을 방문한 1991년 이후 이십여 년 동안 보아왔다. 나라면 다른 어떤 대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 서울을 찾는 이들에게 말해줄 것이다.
서울에는 싱가포르나, 타이베이, 홍콩, 방콕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문학인, 순수예술인, 대중문화예술인, 다양한 분야 학자들의 자취가 있다. 과거라면 도쿄가 패션의 중심으로서, 음악과 춤의 유행의 원류로서 아시아로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서울이 그 중심에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문화 핵분열의 중심지 서울이 아시아 전역으로 그 파장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나 도쿄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모방해 한국식 영화시장에 뿌려졌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영화 콘텐츠가 미국 할리우드의 시나리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심지어 몇몇 작품을 충분히 그 작품성이나 대중성을 인정받아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한국의 문학이 한국의 전통이, 그리고 한국의 예술이 세계로 나가고 있다.
서울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와 지역에서 문화적 활기를 띠게 하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서울의 건축물들은 다른 문화 중심지, 심지어 상하이나 베이징과 비교해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평범한 한국 사람들이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과 같이 작은 범주로 본다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나는 그 힘을 약간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그곳은 애정을 갖고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서울의 작은 혈관들이다. 다른 방문객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서울의 공기는 알 수 없는 설렘을 준다. 아주머니들이 블라우스와 양말 한 켤레를 두고 입씨름을 하는 재래시장에서 느낀 일종의 자유로운 생명력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킨다.
남북으로 나 있는 세종로의 양쪽은 서울에서 가장 못생긴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무미건조한 건물 뒤에서 우연히 발견한 골목길은 나를 새로운 서울로 이끈다.
오래된 나무로 틀이 짜인 사각형의 흰색 석고벽을 품은 한옥은 언제나 나를 반긴다. 절제된 우아함과 세련된 비대칭 감각을 갖고 있는 한옥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다. 금이 간 나무 대문 사이로 보이는 정원은 홍루몽의 대관원으로 이야기되는 송나라 시대의 최고의 건축물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인간이 만든 구조와 자연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둘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한국 정원이 가진 아름다움은 세심하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일본의 정원이나 분재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한 외관에도 그 아름다움은 줄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골목을 지날 때면 오랜 세월이 묻어난 아날로그의 향기에 취하곤 한다. 골목길의 보존은 먼저 주변의 환경 보존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골목길과 연계한 환경 보존이 가시적으로 진행된 사례를 들자면 아무래도 북촌 한옥마을을 먼저 들지 않을 수 없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나와 북쪽을 바라보며 가게 되면 그곳이 바로 북촌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곳엔 어두운색의 기와가 서로 어깨를 마주한 채 늘어선 한옥들과 골목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때 북촌은 숨겨진 마을이었다.
북촌의 한옥은 조선 시대 이후 대대로 이어온 양반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1930년대 이후에 집단으로 지어졌다. 비록 한 채 한 채가 문화재 가치로는 미미할 지라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개발의 바람이 불기 전의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문화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흔히 가회동 31번지로 알려진 북촌은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라는 의미의 가회(嘉會)라는 이름처럼 즐거움과 소박한 정취가 가득한 곳이다. 옛 모습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잘 정돈된 한옥 길로 걸어 올라가면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시간이 정지된 세계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모습은 이곳과 많은 대조를 이룬다. 멀리 보이는 도심은 콘크리트 빌딩 숲 사이로 새로운 건물이 경쟁적으로 높이 오르려고 하지만, 북촌 한옥은 자연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옛 모습과 21세기 문명이 어우러진 북촌 한옥마을은 골목 하나하나가 볼거리로 가득하다.
서울을 찾는 외국의 여행객이라면 집, 사람, 자연이 경계 없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한옥의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 안에서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마루에 앉아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한옥은 상상하는 것 이상 매력적이다. 게다가 골목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처마들의 다양한 얼굴은 인공의 아름다움과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서촌의 골목길 또한 자연스러운 숨결이 묻어나는 곳이다. 효자동, 누하동, 통인동, 체부동으로 연결되는 이곳의 골목길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풀어놓는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으로 나와 경복궁 돌담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오면 영추문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서촌으로 가는 여정의 출발지이다.
이곳에서의 인상은 화려한 현대식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빨강과 파랑, 흰색이 스프링의 무늬처럼 그려진 이발소임을 알리는 표시와 인쇄 활자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약간은 어색한 오래된 페인트 간판. 골목 곳곳에 숨겨진 찻집과 갤러리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고 좁지만,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화되지 않은 듯 보인다.
개발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에 무슨 매력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엔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의 한 장을 채우고 있는 수성동 계곡과 옛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과거의 테두리에서 박제된 유물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사는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그 흔적은 60년이 넘은 헌책방과 철물점, 40년이 된 분식집, 세탁소와 구둣방, 동네 빵집과 50년 전통의 중국집, 그리고 그사이 새롭게 들어선 공방과 미술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지적도를 본다면 서울 시내에서 조선 시대와 현재의 지적도가 거의 변동이 없는 동네가 바로 이곳일 것이다.
북촌, 서촌이 오랜 세월의 유산으로서의 공간을 이야기한다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유산을 만들기도 한다. 몇몇 사람이 모여 길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시의 지원을 업고 변화되거나 옛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진 곳이 아마도 ‘낙산’일 것이다. 젊음과 문화의 에너지로 가득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을 조금만 벗어나면 고즈넉한 골목이 나온다. 골목들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흡사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하는 낙산이 공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곳은 서울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항상 변방 취급을 받았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일이 없다 보니 사람들은 낙산을 강원도 낙산사가 있는 그곳 어딘가로 착각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애태우던 낙산의 과거 기억은 사라지고 허름한 서민 아파트가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도심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름답고 찾아가 보고 싶은 문화 예술마을로 새롭게 탄생했다. 바로 이화벽화마을이다. 이화장을 지나 낙산공원으로 향하는 길 여기저기에서 토끼와 나무가 그려진 낡은 담벼락, 꽃과 물고기 떼가 그려진 층 높은 계단을 만날 수 있다. 한때 마을 주민에 의해 지워졌다 복원된 천사의 날개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곳이 이렇게 변모하면서 대학로에서 시작해 낙산공원, 조선 시대에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던 서울성곽 바깥쪽까지 낙산으로 묶여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공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골목길 문화의 흐름을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는 형태로 바꿔 놓은 사례가 ‘벽화마을운동’이다. 특히 벽화마을은 사람들이 꺼리던 공간을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화벽화마을을 포함한 몇몇 마을에 ‘예술의 벽’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대학생의 자발적인 시도나 기업 사회공헌의 일종으로 일어나는 경우, 공공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서울의 낡고 오래된 마을의 벽들은 모두의 캔버스가 되어가고 있다. 이를 통한 이미지 변화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러한 마을 가꾸기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을이 계속 늘어가는 추세다.
이런 변화는 서울의 오래되고 낡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어둡고 음침한 골목길은 그림을 통해 하나하나 변화하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던 마을에도 활기가 생겨났다. 골목길 담벼락 밑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고 가던 사람들도, 골목길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이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높은 올라가야 하는 곳에 더 숨 막힐 정도로 낡고 허술한 집들로 빽빽하게 차 있던, 항상 재개발이란 단어가 따라붙던 이곳이 변화하는 것이다.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그려지는 벽화들은 홍대 앞 그래피티와 달리 마을의 특성과 주변 이미지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강동역에서 내려 천호역 방면으로 걷다 보면 ‘강풀만화거리’라고 쓰여 있는 간판과 ‘어서 와’라는 문구, 그리고 그 사이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캐릭터와 마주하게 된다. 아기자기하게 생긴 이 간판은 보는 사람들이 ‘이곳이 어떤 곳이지?’ 하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곳에 들어서면 보물찾기라도 하듯 벽에 그려진 지도와 웹툰 작가 강풀이 그린 벽화들이 보인다. 강풀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활동하던 작가로, 한국에서 꽤 유명한 웹툰 작가다. 웹툰을 영화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강풀은 강동구라는 특정 지역을 작품의 주 무대로 설정하여 스토리를 입히고 있다. 그만큼 지역사회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풀만화거리도 따뜻한 마을 만들기 사업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된 골목마다 강풀의 만화가 여기저기 숨어 있다. 작가의 웹툰인 순정만화 시리즈 4편의 이야기가 마을의 이야기와 엮여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웹툰을 감상하라는 듯 그려져 있다.
주택의 한쪽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가게의 디자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가게 유리창에 강풀의 만화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구경은 고사하고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어려운 좁고 굽은 골목들 사이사이로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물찾기하듯 정신없이 벽화를 따라가 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마치 구역 표시를 하듯 알록달록한 색으로 전봇대도 색칠해놓고, 지도의 동선 방향과 숨겨진 벽화들을 알려주는 작고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표식도 만들어 놓아 벽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곳은 마을의 이야기와 웹툰을 엮어서 벽화와 조형물을 조성해 놓아 다른 벽화 마을보다 마을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래서 웹툰을 본 독자라면 마치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든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라는 웹툰에서는 좀비로 변해버린 사람들 때문에 아파트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베란다를 통하여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 있다. 웹툰의 그 부분을 주차공간에 창의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주차공간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진 앞·뒤 공간을 이용하여 서로 안부를 묻는 벽화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마치 2D를 3D로 표현한 것처럼 생생한 느낌을 준다.
‘순정만화’라는 강풀의 대표적 시리즈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을 어느 주택의 창문 아래 조각조각 레고 모양으로 조성해 놓아 벽화가 주변과 어우러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보’에서 여자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어느 주택의 대문 옆 담장에다가 벽화로 그려 놓아, 마치 그 집이 웹툰 여자 주인공의 집인 것 같은 상상에 빠지게 된다.
‘강풀만화거리’가 조성된 후,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예전에는 어둡고 오래된 길이다 보니 지나가기조차 꺼려졌는데, 벽화가 그려진 후 그 길을 걷는 것이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주말이면 호기심과 설렘을 갖고 찾는 이들이 많아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한국의 골목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찾아지는 것이다. 골목길을 누볐던 사람들의 숨결이 만들어 놓은 시대의 정신을 찾는 것이다. 또한, 골목길만의 고유의 정체성을 보호하면서 현대적 편의성을 가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북촌과 서촌은 추억을 더듬고 그 속에서 시대를 읽어낸 것이라면 벽화마을이나 강풀만화거리는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의 스토리가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골목길만이 가질 수 있는 친숙함·따뜻함을 살려 외국의 명소 못지않은 문화 중심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