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과학 에세이
원자에 대한 지식은 인류의 역사에 가장 어두운 면을 만들었다. 바로 핵분열이다. 핵분열은 중성자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중성자는 원자 세계에 있어 가장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다.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원자핵의 한 중심으로 접근해 핵과 충돌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가 관건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은 그 중성자가 핵과 충돌해 무게가 더해져 새로운 원소가 나올지, 아니면 핵을 쪼갤지 몰랐다. 마리 퀴리가 그랬던 것처럼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새로운 원소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했다.
그들은 보이는 원소마다 중성자를 쏘는 실험을 했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원자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으로 원자 깊숙이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과학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에너지를 푸는 연구에 10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핵의 비밀이 러더퍼드와 채드윅에 의해 벗겨지고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지배하던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에너지의 실체가 드러났다. 천재 유대인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에 의해서였다.
그녀가 독일에 온 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나오고 2년 뒤 1907년으로 28살 때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 다른 사람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성격에도 새로이 떠오르고 있는 방사능을 연구하기 위해 대담하게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1907년 당시 독일의 대학이나 연구소들은 물리학 분야를 비롯한 학문 대부분의 분야에서 여성을 채용하길 꺼렸다. 그녀에게 최초로 그 기회가 주어지는데, 당시 아인슈타인의 후원자였던 막스 프랑크의 소개로 핵 화학자인 오토 한이 리제 마이트너를 부른 것이다. 당시 화학은 물리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오토 한 역시 자신의 화학 연구소에서 물리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리제 마이트너는 그렇게 세계의 역사를 어둠의 그늘로 돌려놓게 될 흐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녀에게 여성 최초의 교수라는 성공과 명성을 약속한 길이었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는 편견과 유대인이란 이유로 교수권을 박탈당하는 등 공포와 배신으로 점철된 길이었다.
그녀에 대한 편견은 베를린 이전부터 있었다. 당시 여성에게는 대학의 입학이 허용되지 않아 늦은 나이에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그녀는 큰 벽과 마주쳤다.
그 벽은 과학사를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한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볼테르의 여자’라는 불명예에 가려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프랑스 자연철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나,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도 그러한 현실의 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고 프랑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마리 퀴리였지만, 그녀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수 없었다. 또한, 남편 피에르 퀴리의 제자인 폴 랑주뱅과의 사이를 스캔들처럼 떠벌린 프랑스의 우익 언론은 그녀의 명성에도 흠집을 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사람들은 외국인이자 여성이었던 퀴리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리제 마이트너도 이러한 현실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노벨상 후보로 수차례 추천을 받은 과학자이며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이자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연구원 등, 리제 마이트너를 나타내는 모든 화려한 경력에도 나치 정권은 유대인으로만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참고 기다리거나, 혹은 연구를 통해 직접 상대방을 설득하며 무수한 벽을 극복해 나갔다.
원자핵의 비밀을 벗기기 위한 마이트너와 오토 한의 공동 연구도 지극히 불평등한 기반 위에서 시작되었다. 오토 한에게는 연구실이 배당되었지만 마이트너는 지하 목공소에서 일해야만 했다. 화장실이 없어 필요할 때마다 길 건너편의 식당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그녀는 성이 아닌 능력으로 대우받길 원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단지 오토 한의 연구원에 불과했고, 동등한 능력을 갖춘 남자 동료가 모두 정교수가 된 후에도 그녀만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교수로 임용되지 못했다.
마이트너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맞서며 연구할 당시 원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원자를 우리 몸의 세포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중앙에 단단한 핵이 있고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돌 듯이 전자가 핵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러더퍼드와 제임스 채드윅에 의해 핵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양성자와 중성자라는 각각의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차츰 방사성 금속으로 분류되는 라듐, 우라늄 같은 것은 핵 자체가 불안정해서 에너지와 입자들을 누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때 밖으로 나오는 에너지의 값이 사람들이 최초로 목격한 핵의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는 E=mc2의 한 예일 것이다.
1911년 그녀와 오토 한은 목공소를 빌려 사용하던 연구실을 떠나 신설된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의 지위는 많이 달라진다. 거의 남자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은 것이다. 물론 그녀에게 개인 연구실도 주어졌다. 또한, 마이트너는 독일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기도 했다. 안정 속에서 그녀는 오토 한과 공동연구를 통해 프로탁티늄 원소를 발견하는 등 물리학자로서 탁월한 결실을 보기 시작한다.
그녀의 성공은 아인슈타인도 인정했다. 1909년 한 학회에서 그녀보다 한 살 아래의 아인슈타인을 만났는데, 이때 ‘E=mc2’이란 공식을 접한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마이트너를 높이 평가해 ‘우리의 퀴리 부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퀴리 부인은 프랑스어권을 대표하는 여성 과학자였기 때문에 그녀를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인정한 것이다.
마이트너가 여성 과학자로서 설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고 물리학에만 지극한 사랑을 쏟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결혼을 싫어하거나 남자와의 사랑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오토 한과는 친구 이상이길 원했다. 하지만 오토 한은 에디트 융한스란 여성과 결혼을 하고, 리제 마이트너와는 동료 과학자 이상의 관계는 원치 않았다.
마이트너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누군가가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물리학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의 결혼 이후 그녀는 정말 물리학 연구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시간과 열정, 그리고 사랑까지도….
그녀가 최고의 연구 결과들을 쏟아낸 1920년대와 30년대는 핵 연구의 황금기였다. 당시 가장 많이 알려진 핵은 238개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가진 우라늄 원자핵이었다. 마이트너와 오토 한은 이것에 중성자를 추가하여 더 큰 핵을 가진 원자를 만드는 연구를 주도하고 있었다.
마이트너에게는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유럽의 상황은 안갯속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1930년대 독일은 세계 일류 과학자들에게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모두 불안해했고 특히 유대인인 그녀가 연구소에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아인슈타인도 당시 유럽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유명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인종청산 작업에 최우선 순위로 올라 있었다. 결국, 그는 죽음은 피할 수 있었지만 1933년 독일에서 추방당한다. 리제 마이트너가 추방당하지 않은 이유는 오스트리아인이었기 때문이다.
1938년 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정복당해 독일 연방으로 되자 그녀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마이트너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오토 한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연구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에겐 비자나 여권조차 없어 출국금지를 당하게 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럽 각국의 물리학자들도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독일을 떠날 구실을 만들어주기 위해 물리학 회의를 열고 초대장을 보냈다. 하지만 나치 정권은 그녀의 회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1938년 7월 네덜란드의 한 과학자가 베를린에 갔다가 마이트너를 몰래 스톡홀름행 기차에 태워 탈출하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그 상황이 너무 두려워 울며 돌려보내 달라고 빌 정도였다. 큰 위험이 뒤따랐음에도 그녀는 무사히 도피했다.
마이트너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중요한 연구 결과를 눈앞에 두고 그녀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궁핍하고 암울한 시간을 보내지만 마이트너는 오로지 물리학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그동안의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연구소의 소식을 알려주길 원한다고 오토 한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후 오토 한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편지로 보내 자문을 얻곤 했다.
그러던 중 마이트너는 스웨덴의 서부 해안가로 크리스마스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는 그녀의 조카이자 같은 물리학자인 오토 프리슈도 와 있었다. 그즈음 베를린에서 실험하던 오토 한은 이상한 결과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중성자를 쏘아 넣은 우라늄 핵에서 아무리 충격을 주어도 그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벼운 원소인 바륨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이트너는 편지를 통해 이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라늄 생성물 속에서 왜 더 작은 원소가 발견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질량이 더 큰 원소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한은 ‘당신이라면 아마 이 실험 결과에 어떤 식으로든 환상적인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륨으로 분열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라고 써서 보냈다.
그녀는 한의 연구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가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흡사 커다란 물방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큰 물방울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불안정한다. 큰 핵을 가진 우라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그녀는 과거에 큰 핵 안에 중성자를 쏘게 되면 질량이 늘어나서 더 큰 핵을 가진 새로운 원소가 나오기를 기대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핵이 커지면서 그 질량을 견디지 못하고 두 개로 쪼개진 것이었다. 쪼개진 파편들은 막대한 에너지를 내놓으며 날아가게 된다.
그 에너지의 양은 바로 아인슈타인의 E=mc2이다.
그 식을 이용해 사라진 질량을 광속의 제곱을 하면 2억 전자볼트, 즉 원자핵분열의 값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물론 실험을 통해 소량의 우라늄에서 자연방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원자핵을 분열해 얻어지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생성된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E=mc2과 정확히 일치했다.
원자핵 하나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모래 한 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양이지만 모래 한 알에는 10의 24 제곱만큼의 원자가 들어 있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것이다. 달에서 축구공을 터뜨려 그 충격으로 달을 부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이것을 ‘핵분열’이라고 이름 짓고 결과를 즉시 발표했다. 하지만 배신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치의 압력에 못 이겨 오토 한이 마이트너의 이름을 연구자 명단에서 빼버린다. 마이트너의 공은 모든 과학자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여성 차별의 벽에 부딪혔다. 바로 노벨상 위원회가 문제였다. 그들은 마이트너에게 노벨상이 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원자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1944년 오토 한은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는다.
수상 소감을 이야기할 때도 그는 마이트너의 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이트너는 오토 한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오토 한을 이해하려 애썼다. 훗날 오토 한이 만든 독가스에 의해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고 이것을 자책하던 오토 한을 위로한 것도 마이트너였다.
간호사로 자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던 그녀는 나치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독일의 악행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독일의 과학자들과 국민에게 그녀는 분노했다. 아니, 자신의 청춘을 모두 바친 독일이었기에 오히려 분노라기보다는 독일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속죄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연구가 또 다른 불행의 역사를 만든다. 한 줌의 원자가 분열하면 그것으로 미래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비밀의 문을 열었고, 세계 각국의 물리학자들은 핵분열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42년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 아래 미국 전역에 비밀 기지들이 세워졌다.
마이트너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초빙되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그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원자폭탄 만드는 일에는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오토 프리슈는 달랐다. 그는 그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핵무기 개발 경쟁에서 독일에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핵폭탄은 독일과의 전쟁에 쓰이는 대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원자폭탄은 E=mc2의 무서운 파괴력을 과시했다. 소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에서 전자기 방사선 형태의 방대한 에너지가 방출된 것이다.
원자폭탄 투하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리제 마이트너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원자폭탄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과학이 순수하게 인간의 역사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자폭탄처럼 놀라운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은 종종 나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역사 속의 전례를 만들었고, 언제든지 다시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과학이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나쁜 의도를 갖고 발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 과학의 정신만큼 숭고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류는 이전 세대의 유산 위에서 발전한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앞서 간 과학자들이 쌓아놓은 업적 위에서 새로운 해답을 찾는다. 원자가 거의 광속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장치를 이용해 그들은 이제 선조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질문들과 답들을 쏟아 놓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앞 세대의 소중한 경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인슈타인이 1946년에 이렇게 말했다.
‘고삐 풀린 원자력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지켜주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비할 바 없는 파국을 향해 표류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해야 할 말을 대신 해줬다.
‘우주의 구조를 바꾸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내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사람들 간의 온정과 세계평화와 같은 대의를 이루는데 이바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