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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an 28. 2020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_열두번째 이야기

고산의 과학 에세이

달은 왜 지구로 떨어지지 않을까? 

         

뉴턴은 만약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면 무엇이 그것들을 우주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달을 지구에서 벗어나지 않고 돌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스스로 자전한다면, 왜 지구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가 궁금해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그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행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불행은 출생 이전부터 이어온 것이었다.


그는 1642년 크리스마스 아침, 영국에 있는 울즈소프라는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던 해로 마을의 작은 지주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한나는 아버지의 이름은 따서 아기의 이름도 ‘아이작’이라 지었다. 뉴턴은 태어날 때부터 작고 허약한 아이였다. 그를 받은 산파들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약을 구해와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뉴턴은 주위의 근심과 달리 어린 시절을 비교적 건강하게 보냈다. 

뉴턴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대지주인 바나바 스미스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뉴턴을 울즈소프에 살고 있는 뉴턴의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고 새로운 남편을 따라 인근으로 이사했다. 세 살난 어린 꼬마 뉴턴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의 어머니를 하염없이 원망했다. 그는 상실감과 슬픔은 너무도 컸다. 그들에 대한 미움에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사는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일기장에 쓸 정도였다.

그의 학교생활도 그리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가기 싫어하는 학교에 그의 외할머니가 직접 이끌고 갈 정도였다. 어린 시절 뉴턴은 울즈소프 근처의 학교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배웠다. 그는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두뇌와 자연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 숙제를 하는 대신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 만들고 발명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뉴턴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열두 살 되던 해, 울즈소프에서 9킬로미터 이상 멀리 떨어진 그랜섬의 킹스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뉴턴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벽을 수학에 관한 도표들로 도배하는가 하면,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나 새, 동물, 배를 그린 뒤 액자에 넣어 걸어놓으며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학교생활에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시험에서 전체 학생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시험 이후 어느 날, 같은 반 친구와의 시비로 싸움을 벌이던 중, 자신의 시험 성적을 들먹이며 놀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말을 들은 뉴턴은 자신의 성적에 대한 수치심에 더 분노하게 되고 그 길로 돌아가 학교 교과 과정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각인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학교 전체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 결과로 성공회 신부로 있던 그의 외삼촌은 그의 뛰어난 두뇌를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게 하여 대학교 학장이자, 대학교 내 성공회교회 주교가 되는 버로우 교수의 지도로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대학 시절 성적은 그리 높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주어진 대부분 시간은 수학과 천문학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학 생활 중 그의 어머니로부터 지원이 끊기게 된다. 다른 학생들은 사교 생활을 했지만, 뉴턴에게는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지식에 대한 그의 욕구를 해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스스로 공부하던 그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과 만나게 된다. 자연은 모두가 연관성이 있고 하나의 부품처럼 작용한다는 기계적인 관점이 그것이다. 

우리가 시계를 보면 많은 부품이 어울려 각자의 움직임을 갖지만, 전체적으로는 시계라는 하나의 기계를 움직이고 있다. 자연도 이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나중에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중력을 설명하는 방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대수와 기하학에서의 혁명적인 이론을 담은 <기하학>이란 책과도 접한다. 데카르트의 이 책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된다. 공부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폭발시키듯 넓혀 나갔다. 그는 1663년부터 64년까지 근대 수학에 대한 모든 것을 독학으로 깨우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최고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당시 그가 살던 영국은 유럽 본토와는 분위기가 달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책이나 태양이 행성들을 자신의 궤도 안에 묶어두고 있다는 케플러의 생각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그 이론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아이작 베로 교수와 친해지면서 천체 운동과 중력에 눈뜨게 된다. 그는 망원경을 사용해 태양과 달, 행성들, 그리고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한 갈릴레오의 연구를 읽어 나갔다.

당시 뉴턴에게는 망원경이 없었기 때문에 육안으로 하늘을 관측해야 했다. 그러다 그는 1664년과 1665년에 혜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에게 하늘의 모든 것이 신비하기만 했다. 그는 밤마다 달과 지구 주위의 여러 행성을 관찰하고, 낮에는 거울을 통해 태양을 관찰했다. 그런데 그에게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의문들이 있었다. 과연 무엇이 달을 계속해서 지구의 궤도를 돌게 하는 것일까, 지구와 다른 행성은 어떻게 태양의 궤도를 돌면서도 우주에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의 그러한 의문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과학에 대한 계기가 된다. 아마 그가 그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과학 수준은 여전히 몇백 년 전의 그것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1665년 봄, 스물두 살의 뉴턴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석사 과정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페스트의 폭풍이 무서운 속도로 도시들을 휩쓸고 있었다. 1665년 한해에만 런던 시민  10명 중 1명이 죽었을 정도였다. 페스트가 도시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결국 케임브리지대학교는 당분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667년까지 학교의 문은 굳게 잠기게 된다. 뉴턴은 이 시기에 2년 동안 울즈소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야만 했다. 잠시 케임브리지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18개월을 혼자 연구하면서 집에서 보냈다.

이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기회를 주었으며,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에서 중요한 발견들을 선물하게 된다. 그래서 뉴턴 자신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나의 발견에서의 전성기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어떻게 발견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연구 주제를 생각한다네.” 


그는 평소 한 가지 의문이 생기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는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에는 먹는 것도, 옷 입는 것도 잊어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2년 동안 울즈소프에 머물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 가지 과학적 발견을 하게 된다.

뉴턴은 특히 수학에서 수많은 발견을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적분학’이라 불리는 수학 분야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적분법을 만든 것은 수학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다. 독일의 유명한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것을 만들어낸다. 미적분법은 계속하여 변화하는 운동과 복잡한 모양의 면적을 측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날 과학적 문제를 풀어가는 데도 미적분은 아주 중요한 공식이다. 많은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은 거듭제곱한 양은 영원히 같지 않다는 미적분 원리를 이용해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그는 1666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아이작 베로 교수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베로는 그를 부추겨 그의 첫 번째 논문을 쓰게 만든다. 뉴턴은 몇몇 수학자에게만 그것을 볼 수 있게 허용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을 발표하지 않았다. 


수학에서의 발견과는 별도로 그는 빛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빛과 색채는 매혹적인 것이었다. 뉴턴은 빛과 색에 관한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16세기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한 연구 방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색채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프리즘’이라는 삼각형 유리를 사용하여 태양 빛은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먼저 어두운 방에서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햇빛이 통과하게 한 다음 각이 60도인 프리즘을 통해 색깔이 나뉜 빛을 벽면에 나타나게 했다. 그리고 이 빛을 두 번째 프리즘에 다시 통과시키니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의 빛이 다시 백색광으로 합쳐지는 모습도 관찰했다. 

이 실험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뉴턴은 백색광이 무지개의 모든 색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물체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빛이었던 것이다. 


그의 발견으로 우리는 어떤 물체가 왜 그런 색을 띠는지 알게 되었다. 뉴턴은 이러한 프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무지갯빛을 ‘스펙트럼(라틴어로 ‘유령’이라는 뜻)’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펙트럼을 연구하여 화학적 구성물질, 온도, 속도, 운동 방향 등을 밝혀내고 있다. 

뉴턴은 이 프리즘을 이용한 실험으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다. 두 개의 렌즈를 프리즘처럼 하나 위에다 겹쳐놓게 되면 거기에서 빛이 굴절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큰 렌즈가 아니라 거울에 의해서 확대가 되는 망원경을 제작하기로 했다. 

뉴턴을 오목렌즈를 직접 깍으면서 수작업으로 망원경을 제작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반사 망원경이었다. 

이 소식이 퍼져 학술원 회원이 되어 발명품을 등록하라는 권유도 받게 된다. 그러자 뉴턴은 빛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도 되겠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학술원에서 인류 최초의 순수한 과학논문이 발표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음만 받은 것이다. 특히 당시의 유명한 생물학자인 로버트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현미경 연구를 표절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은 그렇지만 당시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편견이 많았다. 좀처럼 다른 사람의 발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는 새로운 이론에 대해 흠잡을 것이 없나를 먼저 보곤 했다. 

실험 과정을 통해서 이끌어낸 근대 과학 최초의 중대 발견은 이렇게 해서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조롱을 받았다. 이 일로 화가 난 그는 미적분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발표할 계획을 취소해 버린다. 그 이후 다시는 논문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논문들을 15년이나 서랍 속에 묻어둬 버렸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이 학계 노예가 된 것 같다. 이제는 학계와는 완전히 결별하겠다. 오로지 나 개인만의 만족을 위해 연구할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라이프니츠와의 미적분법 발견의 원조가 누구냐 하는 다툼을 낳게 된다. 당시 그러한 다툼이 있을 때 뉴턴의 태도는 너무도 오만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그가 먼저 연구했음에도 판결은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법을 확립시켰다며 두 사람 모두의 손을 들어줘 버린 것이다. 

그런데 세계에 충격을 던진 것은 바로 9년 뒤의 이 세 번째 발견이었다. 뉴턴은 이때 수학 교수인 베로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뉴턴은 신이 세상을 만드는 설계도를 찾고 싶어 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과연 어떤 힘이 달과 지구로 하여금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1665년 또는 1666년의 가을, 그는 울즈소프 과수원에 앉아 있었다. 그때 사과나무 가지에서 사과가 한 개 떨어졌고, 그는 그 광경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는데 가을 밤하늘의 달은 하늘에 그대로 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번갯불 같은 섬광이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 아이디어는 전혀 다른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를 조롱했던 로버트 후크와 천문학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였다. 당시 후크는 행성들이 접선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그 행성들을 가운데로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의미도 분명해졌다. 그리고 혜성의 등장은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과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바로 태양 주변의 행성 궤도와 지구 주위의 달 궤도를 유지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사과나 달이나 지구, 태양 모두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뉴턴은 이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밝혀냈다. 바로 수학의 아름다움을 물리 세계에 도입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뉴턴 이후 수학은 우주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뉴턴이 이것을 수학적으로 풀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였다. 그는 1684년 로버트 후크와 크리스토퍼 렌, 그리고 헬리가 만나 대화하던 중 헬리는 뉴턴에게 "만약 행성이 타원 운동을 한다면 어떤 종류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오?"하고 물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뉴턴은 헬리에게 "회전하는 천체에 대하여"란 짧은 논문을 보냈다. 그 논문을 받은 헬리는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케플러는 관측 자료를 통해 태양의 독특한 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태양이 거대한 자석처럼 작용하며 행성들도 거기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갈릴레오는 낙하하는 물체의 가속도에 관한 연구를 한 후 낙하하는 물체가 질량에 상관없이 똑같이 낙하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뉴턴이 나타나 두 사람을 뛰어넘는 놀라운 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그는 지구 위에서 이루어지는 물체의 이동과 낙하 법칙이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떨어뜨린 물체가 지구로 낙하하는 것처럼 행성들도 어떤 의미에선 태양을 향해 낙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법칙을 지배하는 힘을 라틴어로 ‘하늘’이라는 뜻의 단어를 빌려 ‘중력gravity’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일정 거리에 떨어져 있는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말한다. 뉴턴은 중력을 관찰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계산할 수 있도록 체계화했다. 


중력은 일종의 에너지처럼 지구나 행성 같은 물체나 물질이 먼 우주 속으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우주에는 모든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질서를 가지게 되고 이 때문에 중력은 물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헬리는 이 논문을 받아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케임브리지로 뉴턴을 찾아온 그는 설득하며 이 이론을 자세히 써서 영국 학술원에 논문으로 발표하라고 했다. 그리고 학술원의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그 돈을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의 열성적인 후원은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그의 중력 법칙은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아가 운동법칙, 다시 말해 중력의 보편적인 규칙도 찾아내게 된다. 관찰과 수학을 사용해 자연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는 또한 사과가 지구로 떨어질 때의 속도가 지구로 당겨지는 달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에 적용되는 법칙이 지구 주위를 도는 달에도 적용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달은 지구를 지나 우주 공간으로 바로 직행하려고 하지만 지구의 중력이 달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달이 지구 둘레를 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달 또한 자신의 중력으로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만유인력이란 것은 그 물질이 사과든, 지구든, 행성이나 위성, 심지어 태양이든지 간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에 작용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뉴턴의 위대한 저서인 ‘프란키피아’는 조수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속도, 심지어 지구의 모양까지도 중력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질량을 가진 다른 물체에 대해 인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달이 바다를, 지구가 달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태양이 지구를 끌어 당긴다. 물체들이 가까울수록 그 중력도 커진다. 그리고 달처럼 커다란 물체가 지구를 끌어당기면서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것처럼 지구에서는 대규모의 자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뉴턴의 프란키피아는 이렇게 만물에 작용하는 힘의 법칙을 놀랍게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길 ‘이 힘은 두 물체가 가진 각각의 무게를 곱한 것에 비례하고 반대로 두 물체의 거리를 두 번 곱한 것에는 반비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유인력은 두 물체의 무게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강하게 끌어당기고 거리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약해진다. 

이 법칙에 따라 케플러의 법칙도 수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뉴턴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뉴턴의 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바로 뉴턴의 운동법칙이 그것이다.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 보자. 축구 선수가 잔디 위의 공을 차면 골대를 향해 나아간다. 이때 이 공을 골키퍼가 막지 않으면 그 운동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1법칙으로 ‘관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만약 우리가 차를 타고 간다고 상상해 보자. 처음 차가 움직이면 우리의 몸이 뒤로 젖혀지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몸이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또한, 차가 달리다가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몸은 차의 움직임에 실려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차가 갑자기 멈췄을 때 앞으로 튕겨져나가거나, 몸이 앞으로 쏠리게 된다. 

그리고 공은 선수에 의해 차이게 되면 가속도가 붙는다. 가만히 있던 공에 속도가 붙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뉴턴의 제2운동법칙이다. 다른 말로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법칙은 물체의 질량이 일정하면 가해지는 힘이 클수록 가속도가 크고, 가속도가 일정하면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큰 힘이 가해지고, 힘이 일정하면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가속도는 작아진다는 법칙이다. 이것을 식으로 나타낸 것이 ‘힘=물체의 질량×가속도’라는 공식이다. 


제3법칙은 선수와 공 사이에서 생기는 법칙이다. 축구선수의 축구화가 공을 차게 되면 그 공에 받는 힘과 똑같은 힘이 축구화에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친구와 싸우다 때리게 되면 맞는 사람이 받는 충격만큼 때리는 사람의 손에도 충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보통 이것을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뉴턴의 운동법칙은 우주의 작동원리를 설명해 주는 데 있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오늘날 고전물리학이란 학문의 주춧돌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사과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을 정도로 늘 이 문제를 생각해왔다. 만약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지 않았다 해도, 그는 손에서 책이 떨어지는 것을 보거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법칙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사과였다. 떨어지자마자 그가 한 입 베어 먹었을지도 모르는 사과는 중력과 관련하여 뉴턴과 영원히 뗄 수 없는 과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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