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과학 에세이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이 블랙홀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것을 처음 이해하게 된 것은 이 글의 주인공인 아인슈타인이란 20세기 최고의 과학자의 한 연구 때문이다. 바로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을 쓰기 위해서 중력이란 것을 고민했다. 뉴턴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유지해주는 힘으로 중력을 이야기한다. 과연 중력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중력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먼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밤하늘을 보고 ‘우주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하는 질문을 한다.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도 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옛날 조상의 눈에 비친 하늘은 태양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달과 별이 나타나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태양의 위치가 바뀌면 계절이 바뀌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이 때문에 원시인들도 생존을 위해 세상을 이해해야만 했다.
자연을 지배할 수 없었기에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고, 자연을 신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자연과 관계를 맺고자 했다. 망원경 같은 관측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하늘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구조물을 만들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멕시코의 치첸이트사 같은 장소에서 이들은 하늘과 관계를 맺고 신의 세계를 깨닫고자 했다. 이런 구조물들은 단순했지만 변화무쌍한 우주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하늘의 움직임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려고 했다. 밤하늘은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시계와 같아서 고대인들은 언제 작물을 심고 수확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고대인의 생존은 태양과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과 직결되었다.
이렇게 천문학은 천체의 움직임에 기초해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려 하기 때문에 점성술과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점성술은 하늘에 있는 천체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는데 유성이 나타나면 전쟁에서의 승리를, 신성이 나타나면 왕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렇게 먼 옛날, 천문학은 별의 운행을 예측했고 점성술은 우리에게 미치는 별의 영향을 예측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대인들에게 천문학과 점성술은 결코 분리된 영역이 아니었다. 천체의 주기를 알면 운명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점성가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에 밤하늘의 별들을 나눠서 관찰했다. 그리고 가까이 모여 있는 별의 무리를 그 모양에 따라서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비록 운명을 알기 위해 밤하늘을 관찰한 것이지만 그들은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미신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적 관찰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관찰로 인해 전혀 엉뚱한 결론에 도출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하늘의 여신 몸 위에 수많은 별이 있다고 믿었다. 밤이 되면 누트가 세상을 가로질러 몸을 활짝 펴고, 수평선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지구를 건드린다고 말이다.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살던 바빌로니아 인들은 지구는 평평한 타원형이며, 사방이 물로 채워져 있으며, 하늘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둥근 지붕 모양이며 이를 산이 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몇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천체는 아주 넓은 공간에 의해 나누어진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이상한 이론으로 무시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중심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주가 우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별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태양이 이동하기 때문에 지구는 정지해 있는데 하늘이 움직인다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지구가 우주나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주론의 역사는 지구 중심의 우주론을 반박해 가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우주에 관한 지식은 계속 축적되어 갔다.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수학을 이용해 지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태양과 달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그들은 2000년 전에 이미 지구가 평평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자를 통해 지구의 크기를 계산해 내기도 했다. 현대의 컴퓨터로 계산한 것과 불과 10분의 1의 오차만 있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도 계산했고, 지구와 태양의 거리도 계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고대인은 미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또한 별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할 줄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별은 작고 함께 이동했지만 몇몇 별은 더 크고 무작위로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태양계의 행성들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그 움직임을 예측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비록 육안으로 관측했지만 다섯 개의 행성을 찾아냈고 그곳에 신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로 지금의 수성인 머큐리, 금성인 비너스, 화성 마르스, 목성과 토성에는 주피터와 새턴이라는 로마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러한 발견들을 토대로 철학자와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구조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고대 점성술에서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우주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 달, 별, 행성들이 주변을 돌고 있다고 믿었는데 우주를 수정구슬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유리구슬은 양파처럼 여러 겹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A.D. 100~165)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우주의 중심에 서 있고, 달과 태양, 그리고 여러 행성이 각기 다른 속도로 지구 주변을 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행성들의 경로를 추적하며 그들이 무작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주전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행성들의 정해진 경로와 속도변화를 계산하려 했다. 이런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은 행성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주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더해갔다.
그의 우주론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행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과거나 미래, 언제든지 말이다. 이제 우주를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던 셈이다.
그리고 ‘천동설’이라고 불리는 이 우주론은 무려 1400년 동안이나 진리로 인정받았으며 중세 유럽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천문학의 기반도 허물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유럽이 여러 세력으로 나뉘면서 그리스의 다양한 지식의 기반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기반들은 고스란히 이슬람으로 넘어갔다. 이슬람의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책인 『알마게스트』에 의해 큰 자극을 받았으나, 결국 프톨레마이오스가 생각한 것들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관측에서 이슬람의 천문학자들은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을 훨씬 앞설 정도로 정밀하고 뛰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천문학의 발달로 시들했던 점성술도 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점성술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안내서라 할 수 있었다.
최초의 별점(星占)이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로 전해지고, 그것이 아라비아 과학과 함께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천문학자는 점성술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럽으로 건너온 후 교황이나 귀족의 궁전에는 반드시 천문학자를 점성술사를 두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훗날 케플러는 “천문학의 자식인 점성술이 빵을 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아마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점성술이 고대 과학의 중심인 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 것은 인간을 둘러싼 우주와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프면 그 부분은 우주의 행성들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그들의 이러한 생각 때문에 하늘을 관측하게 되었고, 지금의 과학적인 천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출발은 1500년대에 이르러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강한 도전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가장 보수적이었던 폴란드 프란겐부르크 성당의 신부인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그는 천동설에 반기를 들고 태양이 중심이라는 주장을 하며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주장을 했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돌고 있다고 말하면서 지구가 특별한 존재이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이에 놀란 종교인들은 신의 말씀에 어긋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신이 이 땅을 만들고 그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으니 당연히 지구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어떻게 해서 1400년 동안 이어온 믿음을 뒤엎는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오랫동안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이 이치에 맞지 않아 고민해 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으로는 행성의 운동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만약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생각대로 모든 움직임이 들어맞았다. 태양계의 중심에 있는 지구의 자리에 태양을 넣고 지구가 태양을 돌게 하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제 나머지 행성들도 배치해 보았다. 먼저 수성의 공전주기가 3개월이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까이 놓고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토성은 공전주기가 30년이기 때문에 가장 바깥쪽에 놓았다. 그는 이제 우주의 움직임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행성들의 궤도와 주기가 너무도 잘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신이 잘 정리해 놓은 질서 있는 마법과도 같았다. 그의 생각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변화가 생기면 그의 이름을 대며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지구가 24시간을 주기로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1543년 그가 죽기 직전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란 책에 옮겨져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책에서 말한 것을 정리하자면,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도는 여러 개의 행성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지구가 팽이처럼 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의 이동도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며 지구를 도는 유일한 행성은 달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과학에 있어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천문학자들에게는 외면당했다. 그러던 중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천문학자 케플러에게 있어 그의 이론은 학문적인 등불이 되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와는 달랐다.
그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외쳤다. 케플러는 수년에 걸쳐 하늘을 관측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관측한 자료들을 토대로 계산해 나갔다. 그 결과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또한, 행성들이 태양을 돌면서 완전한 원이 아닌 타원형의 궤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태양을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데 또다시 신을 부정하는 이론이 나온 것이다. 그들의 생각으로 신은 완전하기때문에 행성의 운동도 완전한 원 운동을 해야 하는데 타원 운동을 한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타원의 궤도를 돈다는 것은 행성들이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공전 속도가 더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점점 더 느려지는 현상이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이것을 발견한 것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화성의 공전 궤도를 계산하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을 풀기 위해 그는 직접 공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일은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케플러 자신도 이 문제를 해결하다 거의 미칠 뻔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최초로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어냈고, 행성의 움직임을 태양과 직접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이었다.
이제 케플러에 이르러 지구에서 바라본 우주의 모습은 명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케플러도 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의 계산으로 보면 행성이 완전한 원을 그리면서 운동하는 게 아니었다. 그 속도도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태양이 행성의 공전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종교와 과학은 우주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끝없는 논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러다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태양이 이 행성들의 움직임에 관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의문이 풀어졌을 때 세상은 다시 한번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다는 믿음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그 뒤에 나타나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 무렵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전의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생각을 이어받아 아주 구체적으로 그것이 옳음을 증명했다.
1609년 겨울, 갈릴레오는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발명품인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찰하였다. 망원경은 과학적으로 보면 가히 혁명적이었다. 망원경의 원리는 간단해서 두 렌즈를 나란히 배치하고 통으로 감싸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렌즈를 직접 갈아 당시로써는 최고의 성능인 30배의 배율을 가진 망원경을 만들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천체 관측용으로는 최초의 망원경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산봉우리와 분화구로 뒤덮인 아주 크고 둥근 달, 환하게 빛나는 금성과 거대한 목성, 고리를 걸고 있는 토성을 보았다. 그 중 가장 놀라운 광경은 금성이 달처럼 모양이 변한다는 것과 목성을 돌고 있는 네 개의 달이었다. 만약 금성이 태양과 함께 지구를 돌고 있다면 모양이 변할 수 없었다. 달처럼 모양이 변하는 것은 금성이 태양을 따라 돌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목성을 보면서 태양계의 축소판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가 본 풍경이 천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제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다.
갈릴레오 덕에 지구가 있던 태양계 중심 자리에서 지구를 빼고 태양을 앉히면서 지구도 여러 행성 중의 하나이며 우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고 추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천문학의 역사는 이렇게 세 사람에 의해 큰 전환점을 맞다. 코페르니쿠스는 사고에 의해 지동설을 주장하고, 케플러는 수학적인 방법을 동원했으며, 갈릴레오가 실제로 천체를 관측함으로써 이론을 증명한 덕분이다.
고대인들은 육안으로만 하늘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제 그 한계를 뛰어넘는 도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망원경은 고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경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교회에서 주장하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천동설과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동설의 경계이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 교단에서는 마틴 루터가 이끄는 종교개혁으로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갈릴레오의 이론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교회의 권위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갈릴레오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종교개혁으로 힘이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막강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의외의 반응을 내보였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본 것을 기록한 책 ‘별세계의 보고’를 환영한 것이었다. 추기경 바로니우스는 그의 이론을 보고 “성경은 하늘로 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 하늘의 움직임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훗날 갈릴레이가 종교재판까지 받게 된 것은 그가 주장한 지동설의 내용이 아니었다. 교회와는 무관하게 갈릴레오 독자적으로 그것을 연구하고 관찰했다는 이유였다. 갈릴레오의 그러한 모습이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종교재판으로 그는 피렌체 외곽의 자신의 집에 갇힌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조치가 그에게는 약이 되었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케플러가 풀지 못한 태양이 어떻게 행성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할 단서를 찾게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낙하하는 물체의 속성’에 대해 쓴 책에서 물체가 그 질량에 상관없이 낙하 가속도가 똑같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갈릴레오 이전 거의 2000년 동안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했던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직접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그가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질량이 다른 물체 두 개를 떨어뜨려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갈릴레오가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도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낙하한다는 것이었다. 공기저항 때문에 가벼운 것일수록 더 천천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기 저항이 미치지 못하도록 한다면 달라진다. 만약 책과 깃털을 따로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틀림없이 책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책 위에 깃털을 올리고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책이 깃털에 미치는 공기저항을 없애기 때문에 둘은 같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간 우주인들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우주인들은 달이 공기가 없어 무게가 다른 두 물체가 같이 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실험 결과 그 믿음은 맞아떨어졌다. 무게가 다른 두 물체가 같이 떨어진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것을 그의 마지막 저서에 남겨 새로운 세기의 중요한 발견에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던 해에 태어난 또 다른 천재가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퍼즐 조각을 연결해 ‘중력’이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천재는 바로 아이작 뉴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