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창밖으로 스치는 눈 덮인 툰드라의 풍경이 마치 끝없이 캔버스처럼 펼쳐져 있다. 그 캔버스에는 내 실수들의 다채로운 흔적이 그려져 있다. 이번 여정을 통해 나는 실수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각 눈송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여정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여정은 쌓이고 쌓여 자신만의 언덕을 형성하고 있다. 차가운 표정의 러시아 승무원이 만들어 준 대조되듯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자니 안내음성이 들려온다.
“Поезд № 120 РЖД «Владивостокский экспресс» прибыл на вокзал Новосибирска. Текущее время по московскому стандарту — 3:40 утра. Время остановки на этой станции составляет 28 минут”
러시아 철도 120편, 블라디보스토크행 익스프레스가 노보시비르스크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모스크바 기준시로 새벽 3시 40분입니다. 이 역에서의 정차 시간은 28분입니다.
눈보라를 뚫고, 시베리아 한복판 노보시비르스크 역에 멈춘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차에서 내려서는 순간,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나를 맞이했고 나는 앞으로 마주할 실수들을 고민했다. 겹겹이 고민으로 쌓인 머릿속과 달리 주위를 둘러싼 눈 덮인 도시의 모습은 고요하게 펼쳐져 있다. 눈 덮인 역광장을 가로지르며, 나는 내 삶의 실수들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이 여정의 시작은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 세계유랑 프로젝트 : 대학로에서 에든버러까지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또래들보다 일찍 나만의 이름을 건 연극을 극장에서 올릴 수 있는 기회들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작업을 창작하며 3년 차를 앞두는 시점에서 나는 느리고, 넓고, 다양하며, 누구도 하지 못한 도전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나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주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입니다”
나름 거대한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조언을 받으며, 수많은 이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응원과 동시에 우려도 존재했다. 준비하는 프로젝트는 러시아까지 소식이 닿았고, 젊은 한국인 9명이 언제 야수로 변할지 모르는 시베리아를 그것도 육로로 넘어 유럽으로 간다는 여정은 만류의 전화를 받게 하기도 했다. 우연히 받게 된 영사관과 여러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정을 공유하던 우리와 영사관은 걱정을 기반한 동료가 되어 서로 응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곤 고국을 떠나 첫 도착지인 블라디보스톡에서 영사관의 영사와 직원들이 우리를 마주해주고 안전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러시아를 포함해 9개국을 거치며 수많은 도시와 다양한 문화, 공존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스치고 머물렀던 모든 존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엄혹한 자연의 시베리아에서부터 영국의 고즈넉한 거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는 자신만의 매력과 고유한 색채가 존재했다. 모든 만남과 경험은 나에게 삶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새삼 깨닫게 했다. 마주침 속에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이끈 실수들이 실제로는 삶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창출하는 데 필수적임을 깨달았다.
#극장이와 조우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조도라는 섬마을에 한 마을버스가 있었다. 이 작은 섬에서 마을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었던 마을버스는 자신의 역할을 다해 수도권의 어느 중고자동차 판매점에서 우연하게 나와 마주쳤다.
새 파란색으로 도색된 버스는 예리한 바닷바람 때문인지 올라타는 계단이 삭아 있었다. 운전자가 앉았던 운전석에는 스티커 자국이 남아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있었다. 삭은 철판과 쭈글쭈글해진 의자를 가진 이 버스를 바닷가 작은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보물상사와 같았다.
봄이 찾아오는 4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바닷가를 떠나 우리와 함께 특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곤 우리는 ‘극장이’라는 이름을 짓고 동행자로 함께 했다. 극장이에 몸을 싣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버스에서 우주선으로 변모했다. 끝없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무한한 별들 사이를 여행하는 우주선처럼 우리를 이끌었다. 그것은 끝없이 확장되는 가능성의 공간과 길, 각 별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지닌 채 반짝이는 것처럼 극장이는 우리는 이끌며 반짝이는 수많은 도시를 데리고 가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탐험하는 여정이었다. 이 우주는 실수와 깨달음, 삶의 깊은 성찰을 품고 있었다.
어느 특별한 날, 우리는 위험해 보이는 길을 선택했다. 날카로운 바위와 미끄러운 길,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마음이 졸였지만,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그 순간의 전율과 도전은 나에게 큰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고,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경험을 깨달았다. 우리는 길에서 만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면서 더욱 강해졌고, 그 경험은 우리의 여정에 더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6~7개월의 긴 여정을 기점으로 집으로 되돌아가는 영국 에든버러에서의 그날, 우리는 극장이와 이별을 고했다. 갑작스럽게 길에서 마주한 이별은 극장이라는 우주가 멈춘 순간이었다. 몇 주간 다시 마주할 방법을 찾고 찾았지만 극장이는 자신의 수명을 온전히 다한 상태였다. 결국, 버스를 폐차하기로 한 결정은 마치 장례식과 같았다. 폐차를 결정하며,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별, 즉 추억과 경험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각 추억은 빛나는 별처럼 그 자체로 독특한 이야기와 빛을 발했다. 극장이와의 작별은 마치 우주 한 켠의 별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간 여정동안 달려온 루트를 그리며 보관한 세계지도는 차마 가져나올 수 없어 극장이 안에 그대로 남겨놓았다. 극장이 앞에서 우리는 그를 추모하듯 서로 돌아가며 우리와 극장이가 함께한 여정의 소중한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극장이와의 여정이 끝났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우주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 극장이 와 함께 하며 막다른 길, 위험한 길, 고립된 길, 숲길, 안전한 길 등 수많은 길을 탐험하면서, 나는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극장이라는 우주는 사라졌지만, 그 우주에서 배운 것들은 영원히 나의 삶의 일부로 남아있다.
때문에 나는 그를 버스가 아닌 나의 인생멘토로 기억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도망치는 여정
극장이와의 이별은 마치 내 삶의 항로에 갑작스러운 폭풍을 몰고 온 것처럼 나의 여정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동료들은 각자의 길로 돌아갔지만, 나는 계속해서 여행을 이어나가 기로 마음먹었다. 내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나를 고향으로, 익숙한 안식처로 불러들였지만, 나는 그 소리를 외면하고 새로운 항해를 계속했다. 나에게 있어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어붙은 현실과 거대한 책임감이라는 빙산에 부딪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사하라사막에 오아시스에서 유유히 빛났던 달이 사라지자 비로소 은하수가 떠올랐다. 셀수 없는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 나의 마음도 그 속에서 함께 속삭였다.
터기 카파도키아에 머물렀을 때 고독해보이는 바위들은 나의 내면과 대화하는 듯했다. 척박한 바위 사막에는 재밌게더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식당이 있었는데 이따금씩 우육면을 주문해 먹을 때 마다 주인과 나눈 대화는 나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메아리와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뭐에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할때마다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두렵고 막막해요. 아마도 돌아 갔을 때 감당해야하는 현실과 책임감이 얼음판처럼 언제깨질지 모르는 두려움 처럼요”
사장님은 내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나의 속삭임에 답하듯 말했다.
"제가 여정을 그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좋겠다고 이야기해도, 어차피 유택씨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시 떠날 거잖아요?"
사장님의 이 말은 나의 내면의 목소리였고, 나의 실수들은 나의 진정한 길을 따르는 데 필요한 단계였다. 그 중식당 사장님의 답변은 나의 실수들이 실제로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끈임없이 선택하는 나의 실수들은 나의 여정의 일부였고, 그것 없이는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엔 심각한 고민에 무심하게 답하는 태도가 미웠지만, 되돌아보니 그 말대로 결국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중간역에 무작정 내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다시 떠났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여행을 이어가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여행을 선택했다.
#실수의 가치를 찾아서
여정을 통해 나는 실수가 삶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깨달았다. 실수는 때로는 우리를 어두운 실패로 이끌지만, 우리에게 깊은 교훈과 새로운 시작을 제공한다. 극장이가 이야기를 해주었듯 무대가 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나의 여정은 실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실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그것들은 나를 나의 경로로 인도하는 나침반 같았고, 내가 누구인지, 나의 진정한 열정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실수는 실패가 아니라, 필요한 교훈이었다. 나는 내 실수들을 통해 배웠고, 그것들이 내 삶의 지도가 되어주었다.
이제 나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삶의 길잡이로 받아들이며, 미지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간다. 실수는 나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다. 이 여정을 통해 나는 실수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소중한 부분이며,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실수들은 우리가 더 깊이 성찰하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미숙했던 나에게 실수는 가끔 실패로 이어졌지만, 이를 통해 진정한 성취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겪은 실수들은 삶의 변곡점을 그려내며,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그것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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