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충고
안녕?
사실 편지가 들어있던 상자는 이전에 발견했지만, 이것을 여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어. 묵은 먼지가 얹어 있는 상자를 열자,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쿰쿰하고 묵직한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고, 그 속엔 색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어.
서로 나누었던 10년 전의 편지들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이, 당시의 감정과 꿈을 느낄 수 있게 해주더라. 편지 하나하나가 숨겨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어. 네가 그때 남겨놓은 말들은 마치 예전의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듯이 느껴졌어.
불안하고 미성숙했던 시기, 우리가 놓친 기회와 찾아야 했던 길, 그리고 나의 방황과 열정이 서로 교차했던 곳. 고등학생 시절 그 모든 것들이 상자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그러고보니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지?
나름 예술학교라고 건물 외벽을 하늘색으로 칠해 밝은 모습을 뽑냈지만 그 안에는 차가운 시멘트와 형광등 빛으로 가득한 복도를 따라 나란히 늘어져 있던 교실과 연습실, 실습실이 창의력을 떨어트릴 것만 같은 건물이었어. 나는 연극영화과, 너는 미술과, 나는 연기, 너는 소묘. 당시에 유명했던 예술학교라 선배들이 예절을 강요하다보니 누가 선배인지도 모른채 우리 반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었는데 같은 동급생끼리 우렁차에 인사를 하면서 만났지. 너는 긴 머리에 색색의 머리띠를 하고, 누가봐도 미술전공이라는 듯이 남색의 팔토시와 이불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하고 어두운 앞치마를 항상 두르고 다녔던 너.
바로 옆반이라 열걸음만 걸으면 만날 수 있음에도 굳아 서로 편지를 주고 받자고 약속하고는 그 첫 편지가 너였을 때, 너는 편지를 쓰는데 7일간 고민하고 3번 만에 쓰는 편지에서 완성했다고 했어. 네가 그때 나에게 물었던 질문이 기억나니?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것 같아?“
이제야 답을 하지만 나는 나름 열심히 나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 때론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어. 지금은 다르지만, 그 당시의 우리, 미래의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오랜만에 꺼낸 편지봉투 속 네 편지는 아주 특별해 보였어. 너의 그림이 담겼으니까 직접 색칠한 노을 하늘과 같은 주황색, 노란색, 붉은색 등 수채화로 서로 스며든 색들은 네가 당시 어떤 하늘을 바라보며 편지를 준비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줬어.
또 다른 색으로 하늘이 그려진 두 번째 편지에서 너는 이렇게 말했지.
"이 편지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왜냐면 나는 이다음에 유명한 작가가 되어있을 거니까!"
현재에서 저 문장을 읽고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웠어. 너는 자신에게 한 말이겠지만 지금에서야 다시 읽어보니 네가 한 저 말. 당시 고등학생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어.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 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야. 작은 예언과도 같아 보여.
편지를 읽다 보니, 서로가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그 순간이 떠올랐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길을 선택했는지는 편지에는 나와 있지 않아 궁금해지기도 해. 각자가 목표와 방향이 있었을 텐데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대로 살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면서 떠올랐어, "그때의 너, 그때의 나는 어떤 미래를 그렸을까?"
오래 전 편지를 쓰는 너, 답장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 마치 밤하늘의 별빛들처럼 시간대가 서로 얽혀 있는 것 같아. 편지를 읽으며, 마치 너와 함께 고민하고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너는 나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순수하고, 조용하고, 자기공부하고, 친근하고, 은근 강한 면이 있다고 했어. 나라는 사람을 꽤 유심히 그것도 섬세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것과 비교하면 난 너를, 다른 이들을 유심히 관찰해본 지가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너는 이 편지와 함께 선물로 당시에 나의 모습을 그린 소묘를 주었어. 특별한 선물에 뛸 듯이 기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두었지. 이사를 하더라도 초상화는 항상 내방 벽에 함께 있었어. 하지만 어느 시점이었을까 벽에서 초상화를 떼어내고 돌돌말아 상자와 함께 찬장 위에 두었어.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싸구려 프린팅으로 된 인테리어 소품이 대체되었는데, 액자가 교체되는 순간 나는 어른이 된 것이었을까?
3년이라는 치열한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하고, 각자의 전공에 맞춰 다른 대학을 들어가면서 연락이 닿지 않았어. 물론 쉽게 끊어진 것이 아닌, 언제든 연락을 하자고 했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서로 적응해가며,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너의 편지와 함께 고등학교 1학년 새내기 때 연기선생님이 써준 또다른 편지가 함께 들어있어.
”2007년 11월 20일 새벽 3시 31분. 유택이에게.
어떤 일이든 해결책과 열쇠가 있단다. 다만 그것을 사용할 때는 어려운 현실이 함께 하는데 그것을 절대로 피하거나 대충해서는 안 돼 그것을 몸속 깊숙이 새기렴.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리고 어른이 되어 갈수록 할 일이 더 많아 질거야. 좌절하거나 단념하지 말고 달려가기를 바란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그 당시의 연기선생님은 내가 연기나 배역에 대해 질문을 할 때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 선생님과 같은 진지한 표정을 한 껏 지으면서 “글세, 왜 그럴까? 너는 왜 그런 것 같니?”라며 항상 되물었어. 명쾌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는 선생님이 답답했지만 ‘왜?’라며 되묻는 질문은 영화에서 키팅선생이 학교를 떠날 때 책상 위로 올라가는 몇명의 학생들의 변화처럼, 자신에게 질문하며 정체성을 찾아 유랑하는 평범하지만은 않는 나로 만들어 준 것 같아.
생각해보면 우리는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좌절하고 단념하는 순간들이 있었지. 선생님의 조언처럼 좌절과 단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나의 좌절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단념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어 주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생각해. 나는 여전히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던 수많은 말들과 지지, 응원들이 이모든 순간들과 이곳까지 이끌어 주었고,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 그러기 위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우연히 떠올릴 수 있는 말들을 남겨놓아야겠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귀띔을 해줘.
늦은 답장을 너에게 쓰며,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각자가 살아오며 가진 시간을 그대로 인정하며 살기로 하자.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항상 네게 기대고 있을게. 곧 만나자!
2023년 12월 22일 금요일, 밤 10시 19분
창문으로 어두운 하늘과 흩어지는 별들이 나를 감싸는 자리에서.
작가의 소통창구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