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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디 PADDY Jan 30. 2024

들리지 않았던 세상

난청입니다.


잘해야만 소중해지는 일들이 있다. 듣는 일도 그런 일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대화에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그날도 들어야 할 말이 참 많은 날이었다. 주요한 회의가 있었고, 며칠 전부터 그 회의를 위한 준비를 했다. 사무실로 향하며 느낀 날씨는 봄날의 포근함을 품고 있었고, 나는 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 채 좋은 예감을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라는 캐치볼에서는 각자의 글러브가 상대의 공, 즉 의견과 질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던진 공이 상대의 글러브에 안착하듯, 내 의견이 상대의 이해와 공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준비해 갔던 말들을 모두 내뱉었다. 만족스러운 회의의 시작에 기분이 좋았고, 이제 나에게는 상대의 말을 잘 듣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순조로운 줄로만 알았다. 이처럼 여유롭게 진행되던 회의에서 이상함을 느낀 건 순간이었다.


상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얼굴이 찡그려졌다. 상황 파악이 힘들었다. 마치 내게로 날아오는 공을 놓쳐버린 것처럼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내가 처음 한 생각은 간단했다. 말하고 있는 여성분의 실수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전달해야 할 이야기를 너무 작은 목소리로 얘기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그 목소리는 내게만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수영장에서 물을 귀에 가득 채운 채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주변의 말소리들이 뭉개져 내 귀에 도달했다.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법한,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나의 입은 제 할 일을 다 했지만, 나의 귀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다. 공은 제대로 던졌지만, 제대로 받지는 못한 거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청각에 이상이 생긴 거였다.


그 길로 서둘러 병원에 들렀다. 급한 마음으로 들어간 동네의 이비인후과에선 심각한 표정을 하며 큰 병원을 권했다. 덩달아 심각해진 나는 곧장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몇 번이나 내 귀를 매만졌다. 제발 큰 이상은 없길 바라며 입술을 짓씹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이 떨어지자, 나의 세계는 순식간에 멈춘 듯했다. 그 순간, 마음은 급격히 내려앉는 롤러코스터처럼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내게 너무나도 중요한 이 문제에 대해 의사의 표정은 의외로 무심해 보였다.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숨겨진 불확실성은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병원의 차가운 벽은 마치 내 감정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끌려가는 기분으로 향한 검사실은 새하얗고 조용했다.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크고 넓은 검사실 안에서 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사람일 뿐이었다.


“난청입니다.”


복잡한 검사 절차보다 훨씬 간단한 결론이 나를 맞이했다. 난청이었다. 의사는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보청기를 껴야 한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하게 느꼈던 청각의 손실은 내게 너무 큰 불편함을 주었고 내 귀가 제 역할을 못 해낼 것이라는 두려움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보청기를 끼는 것을 선택했다.


그 작은 기계, 내 귓속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은 그것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미세하고도 강력한 다리였다. 직선보다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 작은 기계는, 날 도와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조그마했다. 의심이 들었지만 역시나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나는 그 작은 기계를 믿는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곡선은 나의 세계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낀 보청기는, 내게 새로운 세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평소 듣지 못했던 아주 다양한 종류의 소리들이 보청기를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세상은 점점 초점을 맞추는 카메라 렌즈처럼 선명해졌다. 그간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주변의 세세한 소리들이, 한때는 불분명했던 색채들이, 이제는 나의 새로운 세상을 구성하는 선명한 텍스처로 변모했다. 보청기를 낀 순간, 평범했던 일상이 예술작품처럼 다채로운 색과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불편함과 두려움을 해소하고 처음 든 생각은 우습게도 거부감이었다.  원래는 듣지 못했던 온갖 소음과 배경음과 같은 주변의 수많은 청각적 정보들이 선명하게 밀려오며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남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걸까. 생소하게 되살아난 감각에 적응이 힘들었다. 마치 안전한 방공호에서 나와 날 것의 세상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보청기를 끼는 행위에 내가 거부감을 느낀 또 다른 이유는 내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 귀는 어느새 보청기가 있어야 하는 신체 기관이 되었고, 보청기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소리를 나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보청기가 내 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귀를 막고 이야기하듯이 스스로의 목소리가 너무나 잘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바깥의 수많은 소음, 그리고 내 목소리까지. 평소에 내 귀로는 듣지 못했던 너무 많은 소리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보청기를 통해 처음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먼바다에서 오는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변화에 적응이 힘들었던 나는 결국 선택적으로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보청기를 빼놓고 산다. 의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내게 충고했지만, 아직은 내가 원래 생활하던 조금은 불편한 일상이 좀 더 익숙하다.


그와 동시에 잘 들리지 않는 일상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조금 모순적인 말이지만, 난청은 도움이 된다. 날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위협적으로 들리는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차단해 주고, 또 동시에 내가 어떤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공부하는 학생들이 귀에 이어 플러그를 꽂고 소음을 차단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몸이 제 기능을 다 하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눈과 귀를 포함한 감각 기관이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할 때 그를 빠르게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눈이 잘 안 보이면 안경을 쓰고, 귀가 잘 안 들리면 보청기를 끼듯이. 불편함을 두려움으로 만들고 두려움은 다시 초조함을 만들어 우리가 빠르게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난청이 내가 집중력과 안전함을 느끼는 것에 도움이 되었듯, 우리 모두가 겪는 삶의 불편함들, 그 안에서도 종종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발견하곤 한다. 작은 불편함이 우리를 더 큰 이해와 인내, 그리고 새로운 순간으로 안내해주기도 한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에 감각을 곤두세워 반응하는 것보다 가끔은 작은 소음들은 그대로 흘려보낼 때 더 나은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하듯이.


이건 무관심이 아니라 관용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보청기를 선택적으로 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들여 감춰 놓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굳이 증폭해서 듣지 않는 사람. 따뜻한 난청을 가지고 관용이 점점 사라지는 이 사회에서 조금은 너그러울 수 있는 그런 사람. 불편함의 감수하고 다정함을 선택하는 사람. 


하나의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다른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 병원에서 난청이 귀를 잡아먹게 하지 않기 위해 눈에 의존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 말을 거꾸로 한다면, 눈에 의존하지 않는 순간에서야 청각이라는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개선점을 찾지 않는 게 개선점을 찾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거다.


불편한 부분에 대해 고칠 점을 찾는 것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건 너무 많은 소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이기도 하다. 회의에서 필요한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일상에서 모든 험담과 약점을 듣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고,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보청기를 끼면 될 일이다.


이처럼 사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청기를 끼고 회의에 집중하듯 감각을 곤두세우겠지만, 그 외 일상적인 나날에서는 조금은 따뜻하게, 그리고 조금은 둔하게 사람을 대하고 싶다.


잘해야만 소중해지는 일이 있듯, 잘하지 못할 때에 와서야 비로소 의미를 알게 되는 일들이 있을 테니까.


(이 이미지는 글을 바탕으로 AI가 그린 그림입니다. 이미지 생성: OpenAI의 D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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