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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Dec 19. 2021

죽음

2016.3.26.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이걸 평생 안고 갈 바에야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고 느낄 만큼 끔찍한 고통을 순간 순간 겪는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눈 앞이 핑 돌고, 구토를 할 것 같으면서, 심장이 멈추는 것 같고, 숨도 안 쉬어진다. 어떤 장면이 기억날 듯 말듯 어른거린다. 그걸 기억해 내면 괴로운 게 다 사라질 것 같으면서도, 또 그걸 기억해 내면 기절해 버릴 것 같기도 하다.


이 괴상한 증상은 보통 혼자 걷다가 자주 나타나는데

한바탕 휘몰아치고 나면 '이렇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 혼자 넘어지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이 미친 증상 후에 문득 대학교 학생증이 떠올랐다.

댕강 자른 단발머리를 한 내 사진 아래 B라고 적혀있었다. Rh+인 것도 적혀 있었나? 어디서 사고라도 나면 학생증을 보고 빨리 수혈하려고 적어 놓은 거라고 누가 그랬었다. 별 쓸 데 없는 것도 다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참 쓸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죽고 나면 내 장기들이 절실한 누군가를 위해 쓰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의료진이나 구급대원이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나의 지갑을 열었을 때, Rh+B라고 쓰인 학생증을 보고 빨리 수혈을 할 게 아니라 장기 기증자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내 신분증을 보고 몸이 식기 전에 장기들을 꺼내갔으면 했다.


장기 기증자가 되는 절차가 꽤 복잡했다. 병원도 지정해야 하고 받아야 할 검사도 많았다. 결국 의지만 앞서고 실천엔 옮기지 못했다. 다 같이 말술을 마셔도 늘 시체처리반이었던 나는, 이렇게 튼튼한 간과 위장과 심장을 가져가라고 해도 거절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사실 자신이 없다. 라섹 수술을 받은 눈은 하루하루 침침해지고 간은 술 해독을 못하고 심장은 말했다시피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절실히 장기가 필요한 사람이라도, 내 눈과 위장과 심장과 폐를 받으면 후회할 것 같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였지? 심장 기증을 받은 사람이 죽은 기증자의 애인과 사랑에 빠졌듯, 저 미친 증상도 옮아가면 그게 무슨 민폐인가.


고독사는 결과보다 과정이 무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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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공황장애에서 건져내 준 사람들에게 매 순간 감사하고 있다. (2021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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