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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Apr 15. 2019

요즘 드는 잡생각들(일정한 흐름 없음)

2019.3.25.

1. 어느 날 눈앞에 검은 점이 하나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비문증(飛蚊症)이라고 했다. ‘모기가 나는 증상’이라는 이름이 너무 웃겼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조금 과장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모기라고 부를 수 없던 점 모양이 이제는 제법 다리도 하나 생긴 것 같고 날개도 보이는 것 같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항상 그 위치에 귀신같이 자리를 찾아 앉는다. 흰 벽이나 흰 종이, 모니터의 흰 배경을 보면서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 정말로 모기가 날아다닌다. 정말이지 작명 센스가 대단하다. ‘비문증’같은 그런 모든 반짝이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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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 성별이 암수로 나뉘어 있는 것은 이해를 하겠다. 생식기관이 다르고 외형이 다르게 생긴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물리적인 힘에서까지 차등을 둘 필요가 있었을까? 억울하다. 누군가가 흙으로 빚었든 원숭이가 진화를 했든 힘은 비슷하게 줘야 개체와 개체가 동등한 입장에서 맞장을 뜰 때 한 쪽이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일이 없을 거 아닌가. “너는 내가 지켜줄게” 이런 이야기, 예전에는 생각 없이 설레기도 했고 요즘 들어도 고맙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누군가가 지켜주지 않아도 내 힘으로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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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엔 비단 맞장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 전 회사 유리창에 컬러 필름을 붙이는 작업을 돕느라 창가에 늘어선 책상과 의자를 옮겨야 하는 날이 있었다. 의자는 어떻게 옮기겠는데 책상은 정말 꿈쩍도 안 했다. 멀뚱히 서서 남성 선배들에게 “선배, 책상 옮기는 것 좀 도와주세요” 하고 말하는 내 자신이 너무 무능한 것 같아 화가 났다. 20일 행사가 끝난 뒤에 빌려온 멀티탭 25개를 돌려주려하는데 상자가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다. 굳이 또 다른 선배에게 SOS를 쳤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나도 사무실 생수통이 비면 번쩍 들어서 멋지게 갈고 싶단 말이야. 귀찮거나 고고한 척 하느라 안 가는 게 아니라고 이 사람들아. 근데 인간 말고 뭐 십자매 같은 종족도 암수의 힘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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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로 시작한 tvn 드라마 ‘자백’은 정말 재미있지만 수많은 이전의 영화·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어떤 여성의 개죽음으로 시작한다. 자기가 왜 죽어야했는지도 모르고 죽은 이 여성은 사체마저도 선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죽음은 변호사, 형사, 검사 등 수많은 남성들의 멋진 활약상을 보여주기 위한 시발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너무 많이 나와 닳고 닳은 클리셰 중 하나가 ‘엄마가 유흥업소에 다녔던 트라우마 때문에 자라나서 유흥업소 다니는 여성들을 살해한다’라는 것인데, 제발 본인이 괴물처럼 자라난 것에 쓸데없이 여성 탓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자백에서도 그런 낌새가 보여서 벌써부터 걱정이다.) 성경에서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게 여자가 사과 먹어서고, 김동인은 몸 팔아서 무능한 남편 먹여 살린 불쌍한 복녀를 타락했다고 낫으로 무참히 찔러 죽이더니 아직까지 여자 탓 하는 버릇들을 못 고쳤다. 국문과 졸업 논문이 1900년대 초반 소설 속 여성의 죽음에서 드러나는 시대상 뭐 이런 거였는데 큰 주제가 책임 전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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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인은 만인에 대해 책임 전가 눈치 싸움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외교에서도, 출퇴근 지하철에서도. 나는 콩나물 시루같은 공항철도를 타고 내릴 때 뒷 사람에게 밀려 앞 사람을 확 밀치고 나면 꼭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긴다. 앞 사람에게 '내가 밀고 싶어서 민 거 아니야' 라는 시그널을 주며 내 뒷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돌아보면 뒷 사람도 또 뒷 사람을 흘겨보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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