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트윈픽스의 빗치 Apr 20. 2019

트렌치코트 전성시대

2019.4.19.

바야흐로 트렌치코트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오늘 하루만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을 족히 50명은 봤다.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어쩌다 똑같이 트렌치코트를 입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게 되면 그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세 사람이면 긴장감은 세 배가, 네 사람이면 네 배가 된다. 콩나물시루 지하철 안이거나 하여 자리를 옮길 수 없을 때는 퍽 난감하기까지 하다.


나의 경우에는 괜스레 옆 사람 코트를 훔쳐보며 최대한 디자인적으로 다른 부분을 찾으려 애쓴다.


'나의 트렌치코트는 오버사이즈핏이라면 저 사람의 코트는 클래식하네.'

'내 코트는 약간 밝은데 저 사람 것은 조금 색이 짙어.'


처럼.. 구차하게 관찰력만 늘어난다. 도저히 한 눈에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비슷한 모양과 색깔의 코트를 발견하면 애써 '아냐.. 그래도 내 코트가 더 예뻐...' 하며 정신승리를 해 보려 한다. 그러다가 ‘아니, 왜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와서들 이래’ 하고 괜히 화까지 나는 것이다.

‘아니, 다들 왜 이래요’.  아이디어스 광고 캡쳐

어릴 때부터 내가 스스로 돈을 벌게 되면 좋은 트렌치코트는 꼭 한 벌 사 입으리라 다짐했었다. 차가운 도시 여성 같은 도도한 디자인에 반해서였다.


대망의 첫 트렌치코트는 아주 클래식한 디자인에 색상은 감색이었다. 트렌치코트를 꼭 입고는 싶은데 남들이랑 똑같아 보이는 건 싫어서 찾은 타협점이었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래서 또 트렌치코트를 샀다. (응?)

이번엔 아예 체크무늬로 도배된 격렬한 색의 코트를 골랐다. 길이도 훨씬 길고 품도 큰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였다.


그러나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했던가. ‘트렌치코트’라고 하면 머릿 속에 떠오르는 그 이데아 같은 트렌치코트가 갖고 싶었다.  번 고삐가 풀리자 소비는 멈출 줄 몰랐다. 그 뒤로 더 구입한 트렌치코트는 총 세 벌.


1. ‘방수가 잘 된다고 하니까 비옷처럼 입어야겠다’고 산 클래식한 디자인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2. ‘품도 넉넉하고 길이도 길어서 담요처럼 잘 두르겠다’며 산 오버사이즈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3. ‘아니, 이렇게 소재가 고급스럽고 디자인이 예쁜 옷이 무려 70%나 할인한다고?’ 하며 산 페미닌 무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결국 내 옷장 안에는 트렌치코트만 다섯 벌이 생겼고 그 중 세 벌은 남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그토록 피하려했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다. 일주일에 5일 출근하면서 다섯 벌을 매일 돌려입어도 '넘실대는 출퇴근길 트렌치코트의 물결' 속에서 원 오브 뎀이 되는 날이 3일이나 된다는 뜻이다.



역시 오늘 출근길 공항철도 안에서도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괜스레 혼자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다가 문득 ‘대체 이 옷이 뭐기에 이렇게 모두가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최대한 트렌치코트 군단을 신경쓰지 않는 척 하면서 이런 저런 사진을 찾아보고 글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트렌치코트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장교들이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만든 군복이고, 자칫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름 트렌치(trench)는 ‘참호’라는 뜻이다. 짐이 많은 군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허리띠에 매단 D자형 고리. 비에 젖어도 체온을 쉽게 빼앗기지 않도록 덧댄 이중 어깨. 전쟁의 파편에 맞아 피 흘리는 병사를 지혈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벨트 형태의 소매.


다른 사람과 같은 옷 입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내가, 모든 사람이 입는 똑같은 트렌치코트를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특유의 든든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에 집 밖을 나설 때, 퇴근 후 지친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길 때. 높은 깃을 세워 얼굴을 덮고 양쪽 옷자락을 겹쳐 단단하게 허리를 동여매면 그 포근하고도 편안한 느낌이 참 좋았다. 글을 읽고 나니 자연스레 이해가 됐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종전 후에도 트렌치코트를 벗지 못했다고 한다.


애플 수석 부사장이자 전 버버리 CEO였던 안젤라 아렌츠는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트렌치코트를 한 벌씩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 모두가 한 벌씩 입을 트렌치코트가 있어야 한다. 트렌치코트는 나이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다.


160년 역사를 자랑하는 화석같은 옷. 존재 자체로 사람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옷. 좀 과도하게 감상적인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옷을 나 혼자 입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과한 욕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내 옆에 선 누군가가 트렌치코트를 입었다고 해서 괜히 기분 나빠 하지 않고 그냥 생각을 다르게 해보려 한다.


‘저기 나처럼 트렌치코트를 입은 저 사람, 역시 옷 보는 안목이 있네’


ㅎㅎㅎ 그래서 내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트렌치코트를 입을 거다. 우리 모두 아이코닉한 산(生) 역사를 과감하게 입어보이는 패셔니스타다!

매거진의 이전글 클리오 안티시린 치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