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섰는데 러시아인 직원과 한참 러시아어로 이야기 하던 한 동양인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다.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나보다 좀 더 어려보이는 남자였다. 얼굴이 너무 빨갛게 부르터있어서 차마 한국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몽골 계통의 러시아인이거나 추운 지방에 오래 산 고려인일 거라고 막연히 추정했다.
남자가 얼어붙자 카운터에 있던 러시아 직원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남자를 향해 "까레@#&" 뭐라고 말을 했다.(한국인 아니냐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러자 남자는 쭈뼛쭈뼛 다가와 조금 어눌한 말투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넸다.
답 인사를 했더니 남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남자는 "오늘 막 모스크바에서 도착해서 보름만에 한국사람을 처음 본다"고 말했다.
아, 그럼 여행 중이신 거예요?
아닙니다. 현역 군인입니다.
안 그래도 남자는 (처음 보는 모양의) 군복과 군화로 추정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그렇구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러시아 직원을 가리키며) 아는 사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이방인같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서울에서 온 군인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현역’ 군인인데 부대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혼자 민간 편의점에 들어와서 직원과 대화를 하고 있다? 러시아 교포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괴상한 한국말 억양은 뭐지? 마치 함경북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것 같은 시뻘건 두 볼은? 국내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상한 군복과 군화 때문에 어쩌면 미군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럼 미군이 왜 러시아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개적으로 복무하고 있을까? 모든 정황상 그 군인은 서울, 남한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조금 상상을 보태보자면,
- 그 편의점은 ‘한국 편의점’임을 가장한 정보 혹은 자금 교환국이며,
-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던 러시아 직원 아저씨 역시 전달책이며,
- 볼이 빨갛던 군인은 북러정상회담을 위해 오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김정은 국무위원장 동지를 위해 아침부터 동네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중이었으며,
- 남조선에서 온 여행객에게 괜스레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나서지 못하다가,
- 전달책의 장난기 어린 재촉에 슬쩍 서울말을 흉내내어 인사를 건네봤고,
- 반응이 썩 나쁘지 않자 용기내어 몇 마디를 더 나눠본 어린 북조선 군인이었다.....
ㅎㅎㅎㅎㅎ 좀 웃기긴 하지만, 아 정말 그 사람은 남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건 30년 동안 살면서 모인 내 빅데이터가 모여 육감이라는 형태로 발현된 거라고밖에 말을 할 수 없다.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북한 사람이 북한 음식을 파는 북한 식당이 꽤 많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 같은 외형의 사람 중에 머리가 쓸데없이 단정하며 옷의 색이 무채색이면 북한 사람일 경우가 많다고 했다. 뭐라고 해야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다.
19세기 양식의 베르살 호텔 건물
내가 잘 나와서 맥락 없이 두 장 올려본다
2. 글과 말에 대한갈망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지 3일만에 '카페'라는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중앙광장 맞은편 대로를 지나가다가 모닝커피가 먹고 싶어져서 자신만만하게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카페 이름을 더듬더듬 읽어보니 어제 갔던 코페인 카페의 체인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욱 뿌듯해졌다.
문제: 이 중 카라멜 마끼아또는 얼마일까요
무려 계산대로 가기 전에 메뉴판을 읽고 아메리카노와 라떼, 카페 모카의 가격을 계산한 후 돈을 맞춰 들고 주문을 했다. 생각한 가격이 그대로 나왔을 때의 그 기쁨과 뿌듯함이란!
(사실 잘 보면 눈치껏 때려 맞힐 수 있다)
오늘은 이렇게 꽁꽁 숨은 '박물관(무제이)'도 간판을 보고 찾아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영어를 못한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근무하는 젊은 사람들마저도 내가 영어를 하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아침에 코페인에서도 영어로 커피 주문을 했더니 예쁜 직원이 당황해하며 동료를 급히 불렀다. 나는 그들의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고 그들은 내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결국 세 사람이 메뉴판 하나를 붙들고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켜가며 주문을 성사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커피가 완성 돼 나와있음에도 나를 부르지 못하고 쩔쩔맸다. 결국 내가 눈치껏 카운터에 가서 커피를 받아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어떤 게 라떼고 어떤 게 모카인지 설명해주려고 노력하는 직원이 고마웠다.
카페에서 나올 때 고마운 마음에 "감사합니다"를 러시아어로 말하고 나오고 싶었으나 나 역시 쉽게 "스빠시버"라는 발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무뚝뚝하게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됐다.
영어 메뉴판이 병기된 젤라또집. 정말이지 감사했다.
낮에 간 젤라또집에는 놀랍게도 영어 메뉴판이 크게 병기돼 있었다. 이 곳에 온지 3일 만에 영어가 그렇게 크게 적혀있는 가게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진열된 아이스크림에도 영어로 메뉴 설명이 적혀 있었다. 무엇을 시킬지 고민을 하다가 절반 이상이 사라져서 굉장히 인기가 많아 보이는 하얀 아이스크림이 궁금해졌다.
문제의 표지판 없는 하얀 아이스크림
그런데 다른 아이스크림은 모두 영어로 된 이름이 꽂혀있는데 하필 그 맛만 설명이 없었다. 직원에게 "이 아이스크림은 뭔가요?" 라고 물어봤다.
직원은 잠시 벙쪄있더니 대답 대신 숟가락을 가져와서 한 스푼 떠 줬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뜻인가... 직접 먹어보고 알아서 맞혀보라는 것인가... 한 입 먹는 순간 너무 맛나서 그냥 그 맛으로 달라고 했다. 아직도 내가 먹은 그 천상의 맛 아이스크림이 뭔지를 모른다.
무슨 무슨 크랩이라고 추정된다
러시아어에 대한 갈망은 거리에 나오면 더 커진다. 블라디보스토크거리 곳곳에는 수도 없이 많은 벽화와 문구가 그려져 있다. 이상한 것도 많지만 꽤나 궁금해지는 예술품 같은 그라피티가 많다. 그것들을 죄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렇게나 표정 없고 무뚝뚝해 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생각을 어떤 문구와 그림으로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멀쩡한 벽이 없을 정도로 온 도시를 가득 채운 이 그라피티들이야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인 것 같은데 읽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악사 할아버지의 뒷편 벽에는 무슨 글씨가 써져 있는 걸까
저 여우는 죽은 것인가?
다음 번에 이 곳에 다시 오게 된다면 간단한 러시아어를 말하고 읽을 수 있을만큼 공부를 한 뒤에 오고 싶다. 영어 알파벳 같으면서도 그림같은 키릴 문자가 볼 수록 아름답고, 그 글자가 표기하는 발음도 너무나 이국적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우리가 늘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러시아 미녀'의 실존들이 거리 곳곳을 지나다니고 있는데, 그들이 대화를 하거나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나도 그 발음을 흉내 내보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해안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거리의 이름도 바다와 관련이 많다. 어떤 거리는 해안 1로, 어떤 곳은 연안 18길 , 또 어떤 길은 보트 13번지, 어부골목.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이 사실을 늘 들고다니던 책자의 귀퉁이 작은 글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까막눈이어서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의 낭만을 몰라봤던 거다. 다음 번엔 이 곳 거리의 이름을 스스로 읽고 느끼며 걸어가 보고 싶다.
이 거리의 이름은 '대양'이다. 이런 낭만적인 이름을 읽을 수가 없다니.
사실 이 좁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박 5일을 보내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 곳에 올 필요가 없도록 해 두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 수록 이 도시는 언젠가 다시 오고 싶고, 또 언젠가는 다시 오게 될 것 같다. 무뚝뚝하고 예의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뒷 모습에 이방인은 알지 못할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서투르게나마 그들의 말과 글을 한다면 한 귀퉁이나마 진심을 보여주지 않을까. 다음에 올 때는 코페인을 나서며 당당하게 스빠시버 하고 말하고 싶다.
3. 저는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나와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한 달 전부터 예약을 마쳤던 일정이었다.
그런데 이 달 초,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하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필 내가 여행 가는 날짜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 선배들은 "너 블라디보스토크 가서 1면 톱 단독 써 와라" 라는 끔찍한 농담을 했다. 나는 김정은은 무조건 피해다닐 거라며 치를 떨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곳곳에 경찰이 깔렸다
해양공원에서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악명높은 길이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 도로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침부터 온 도시를 돌아다니던 경찰들이 도로를 통제하고 있더니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아르바트 거리에! 차가! 없다!
이럴 수가
차도 한 가운데서 찍어본 사진
심지어 정부청사 앞 길도 허전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 역시 이런 광경은 처음인지 텅 빈 차도의 모습을 마구마구 찍었다.
나는 김정은을 피해서 그 동안 가 보고 싶었던 연해주 국립 미술관에 들어가있으려 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직원이 "오늘은 안 열어요" 하고 나를 쫓아냈다.
문 앞에 붙여놓은 안내문을 보니 4월 24일 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은 방러 때문에 임시로 문을 닫은 것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국립 미술관은 김정은이 도착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과 일직선상에 있고, 거리도 그닥 멀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건물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다가 저격을 한다거나 폭발물을 설치한다거나 하는 문제를 우려하는 것 같았다.
연해주 국립 미술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의 오늘 마지막 일정을 망친 김정은이 미워졌다. 어차피 우리 집도 기차역 근처여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익숙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집 근처 러시아판 하이마트 입구 앞에 카메라 기자들의 장사진이 쳐져 있었던 거다.
익숙한 광경
우리 회사는 어디에?
차량이 통제된 차도 옆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갑자기 카메라들이 일제히 이쪽을 비췄다. 뭔지 싶어 봤더니 시커먼 차량들의 행렬이 내 뒤 편에서부터 몰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차 안에는 스포츠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자른 북한 경호원들이 타고 있었다.
차량 행렬
흰 버스 안에 무서운 북한 경호원이 탔다
집으로 가려면 기차역 앞에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이미 차량과 행인 모두 통제가 되고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김정은 방러 맞이 뻗치기가 시작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앞.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김정은이 탈 리무진과 경호원들. 스탠딩 하는 jtbc
북한 1호 기자단
서로를 취재하고 있는 남북한 기자들
멀리서 러시아 군인들이 레드카펫을 들고 온다
야 평평하게 잘 펴
어느쪽 카펫에 김정은이 설 것인가
내가 어제 군것질거리 사러 갔던 슈퍼마켓 위에도 취재진이 진을 쳤다
거리 곳곳에 러시아 국기와 북한 인공기가 내걸렸다
레닌 동상 아래 취재진들
카키색 옷을 입은 사람이 현장을 지휘하다시피 했다. 누구지
처음 자리를 잡고 서 있던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바로 옆 우쭉 솟은 담벼락 위였다. 역 출입구부터 건너편 레닌 동상까지 모든 게 다 한 눈에 보였다. 김일성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뱃지를 단 북한 사람들과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만큼 가까이에서 함께 서 있었다. 태어나서 현 북한 거주자를 보는 것은, 그것도 그렇게 많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의 동종업계 종사자.. 너무 기자처럼 생겨서 슬펐다
그 자리만 지켰다면 김정은을 코 앞에서 봤을텐데. 날이 너무 추웠는데도 2시간을 그 자리에서 뻗쳤다. 솔직히 나는 내가 사진을 굉장히 잘 찍으면 회사에 바로 쏴 줘야하는 건가, 설마 나한테 영상까지 찍어 보내라고 하지 않겠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이 도착한다던 5시가 훨씬 넘어가는데도 개미 한 마리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가 지쳐갈 무렵, 러시아 군인과 경찰들이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는 우리들을 자꾸자꾸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위로! 위로!
열혈 취재 북한 기자는 내 얼굴도 스케치해갔다
역 앞에서 대기하던 인파가 한꺼번에 대 이동을 하는 중에, 우리 회사 선배를 드디어 만났다..... 내가 이번 여행 전에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그림인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선배!
(전혀 놀라지 않고 마이크를 건네며) 어, 너 잠시 이거 좀 잡아 봐
나도 모르게 와빠를 잡고 있습니다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셀카
선배 말로는, 러시아 정부에서 공산주의 국가 언론사들은 가까이서 취재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비 공산주의 국가 언론사들은 여행객 신분으로 온 나와 똑같은 취급을 당하며 김정은을 도저히 볼 수 없는 곳까지 후퇴하고 있다는 거다.
김정은... 외출하기 이렇게 두려워서 대체 어떻게 사나....
결국 레닌 동상 뒤까지 밀려났다
너무 추워서 집에 가려 했는데 2시간이나 기다린 게 너무 아까워서 오기로 버텨보았다.
그 와중에 선배와 스팟 공유
그렇게 건진(?) 쓰레기 같은 영상...
김정은 안 보임 주의.....
숙소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로이터 통신에서 발빠르게 사진을 올렸더랬다.
현지 방송에서도 속보라며 현장을 보도했다.
러시아 방송과는 인터뷰도 잘 하는 정은
음..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계획대로라면 내일은 김정은과 함께 루스키 섬으로 들어간다. 본격 국제정세와 함께 움직이는 여행이다.
방송 선배한테 말했더니 "북러정상회담 투어냐"며 "부모님께 이 무슨 불효냐"고 하셨다 ㅎㅎㅎㅎㅎㅎㅎ
아니 나는 그냥 루스키섬 가서 트레킹 하고 싶단 말이에요.. 제발 섬 출입이 통제 안 되길 빌며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