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땀이 났다. 도저히 외투를 입을 수 없는 더위에 괜히 옷을 잔뜩 챙겨왔구나 걱정했다.
그런데 새벽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침부터 비가 안개처럼 흩뿌렸다. 거의 공기 반 비 반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러시아의 날씨구나 싶은 찬 공기가 훅 밀려왔다.
1. 우산을 쓰지 않는 사람들
미리 준비해 간 우산을 자신만만하게 펴고 집 밖에 나섰다. 그런데 길거리에 지나는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우산을 쓰지 않고 있었다.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에 모두 우산 쓰기를 포기한 것일까, 비 따위 내 인생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미친 바닷바람이 우산을 뒤집었다.
비 맞는 것 따위!
우산을 아무리 재정비하고 다시 걸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나가는 사람 중 우산을 쓴 사람은 다 한국인이었다. (이 곳 연해주는 거의 독립운동 하던 시절처럼 한국인이 많다.) 금발 언니들이 비를 맞아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매서운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캣워크로 걸어갔다. 바람과 싸우며 우산을 지키려던 우리 모두가 곧 우산을 포기했다. 나도 모르게 우산을 접고 그냥 미스트려니 생각하며 비를 맞고 걸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워낙에 비가 오락가락 해서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게 더 귀찮은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날씨가 무심한듯 시크한 블라디보스토크 도시남녀를 만들어낸 듯했다.
2. 마음껏 잡솨봐
찾고 싶었던 카페를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그런데 우연히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꿀 가게를 발견했다. 이름은 정말 직관적인 ‘연해주 꿀’.
구석에 있는 작은 가게
예쁘게 진열된 꿀들
꿀이라고 하면 아카시아꿀, 유채꿀 이런 정도밖에 모르던 내 눈 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전동싸리꿀, 꽃가루크림화한 꿀, 말린살구크림화한 꿀, 갈매크림화한 꿀이 다 뭐인지. 벌집도 통째로 잘라서 팔았다.
벌집을 잘라다가 판다
무엇이든 먹어보세요
더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종류의 꿀 병을 그냥 진열해놓고 퍼먹을 수 있는 숟가락을 마련해 뒀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주인 할머니한테 “이거 먹어볼 수 있어요?” 했더니 “응.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다 먹어봐” 라고 말했다...
뚜껑을 열어봤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퍼먹어서 여기저기 파여있었지만 공짜로 먹어볼 수 있는데 위생관념따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종류별로 작은 꿀병들을 사 왔다
내 취향에 제일 잘 맞았던 것은 라스베리 크림화한 꿀이었다. 정말 맛 좋은 향초를 퍼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 줄 것과 내가 두고두고 퍼먹을 꿀을 샀는데 돈이 8만 원도 안 나왔다. 한국에선 생각지도 못할 가격이다. 너무 많이 사서 비닐봉투가 부족하기에 할머니한테 하나 더 달라고 했더니 아주 시크하게 커다란 봉투를 하나 더 내줬다. 이 역시 한국에선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3.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가 단돈 800원
아르바트 거리에는 ‘5 o’ clock’이라는 작은 베이커리 카페가 있다. 영국 콘셉트라고 하지만 굉장히 러시아 동네 맛집 같은 느낌이다. 좁은 가게 안에는 테이블이 정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많은 현지인들이 아점을 즐기고 있어서 역시 잘 찾아왔구나 싶었다.
읽을 수 있는 간판이 그리웠다
영국 콘셉트라 엘리자베스여왕 초상화가 있다
너무나 감동적이게도 카운터에 있는 직원은 영어를 알아들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픈 터라 레드벨벳 케이크, 레몬 타르트, 치즈 스콘, 연어와 치즈가 들어간 뭔가 구운 음식에다가 밀크티 한 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욕심이 많다
정말이지 맛 없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고도 우리 돈으로 만 원이 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나의 원픽은 아메리카노. 너무 맛있어서 거의 원샷하다시피 하고 한 잔을 더 시켰는데 45루블밖에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진짜로)가 800원인 거였다.
로컬 맛집
그리고 이렇게 자리가 좁은데도 오래 앉은 손님더러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은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작업을 했다. 나도 이 동네에 살면서 아지트 삼고싶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다음에 오면 저 창가자리에 앉아야지
4. 코트 걸어주는 할머니
어제 아르바트 거리를 찾아 지나는 길에 본 ‘발해 왕국’ 관련 전시 포스터가 걸린 건물은 아르세니예프 연해주 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은 극동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19세기에 활동하던 탐험가의 이름을 땄다.
박물관 앞
고즈넉한 계단실
유리를 층층이 쌓아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손이 베일 것 같았다.
발해 왕국에 대한 전시가 현재 이 박물관의 메인 전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시 주제인데, 싶다가 생각해보니 연해주가 바로 발해가 있었던 곳이라는 생각이 났다. 이 동네는 땅을 파면 발해 유물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발해 관련 유물은 대부분 동양 느낌이 강한데, 전시관 한 쪽에서 상영되고 있는 유물 발굴 영상 속 고고학자들은 죄다 서양인이어서 느낌이 이상했다. 전시관을 조금 돌다 보면 19세기 부터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 때부터 서양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발해 전시 중
러시아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위에 모피코트 하나만 걸친다고 했다. 이 곳에 이틀 있어보니 알겠다. 정말 모든 실내의 난방이 여름 기온 수준으로 빵빵하다. 실내에 들어가면 모두들 코트를 벗어 한 곳에다 걸어놓는다. 그게 이 동네의 문화인 거였다. 그 조그맣던 ‘5 o’ clock’에도 코트를 걸어놓는 곳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 극장이나 미술관 등에 들어갈 때 겉옷을 벗지 않고는 입장이 제한되며 문화적이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밖이 그대로 보이는 전시장
밖에 경찰같은 아저씨가 있기에 찍어봤다
박물관에 들어가서 표를 끊자마자 직원이 “저기다가 네 가방을 보관하고 코트도 벗어둬”라고 (거의 명령하다시피) 말했다. 가방을 넣어놓고 코트를 보관하러 들어가려 하는데 할머니 직원이 와서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가 직접 들어가서 코트를 걸어둬야 하는 줄 알았는데,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손녀의 코트를 받아주듯 내 코트를 받아줬다. 코트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또 공동으로 걸어둬야 하는데 아무도 도난과 보안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내 코트를 돌려받을 때 필요한 번호표를 건넸다. 동그란 구멍을 낸 나무 조각에 021이라고 빨간색 매직펜으로 아무렇게나 쓴 표였다. 그 표를 보는 순간 ‘아, 도난 따위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사랑스럽다
사실 전시 내용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것은 건물 그 자체였다. 이 박물관은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과 항구 종합터미널을 따라 번화가인 아르바트 거리 방향으로 쭉 올라오는 대로, 현 연해주 정부청사 바로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19세기에는 사업가 바빈체프의 임대 아파트였다고 하는데 마치 강남 한복판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 같은 곳이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보수를 하나도 안했다. 너무나 예쁜 타일로 꾸며져 있는 바닥 곳곳에는 금이 가 있고, 고풍스러운 계단은 곳곳이 깨진 그대로였다. 사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부분의 건물이 마찬가지다.
깨진 바닥
옛날에 출입문이었던 것 같다. 아치 모양이 그대로 있다.
타일이 너무 예쁘다
러시아 5대 항구 중 한 곳이었던 곳, 얼지 않는 항구를 통해 세상의 온갖 귀중한 것들이 들어왔을 곳, 그 때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듯 거리 곳곳에 있는 수백 군데의 은행, 낡고 부서졌지만 화려한 양식의 건물들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것처럼 서 있는 도시가 블라디보스토크다.
환풍구인가
블라디보스토크가 가장 번창했을 당시 이 곳 누군가가 신었을 예쁜 신
19세기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도 폭설을 그냥 맞는다
소와 교감하는 러시아 여성인데.... 마치 내 얼굴을 잡고있는 것 같네
옛 지도에 표시된 블라디보스토크
5. 국영 백화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는 ZARA가
박물관에서 가까운 중앙광장에는 소비에트 혁명 용사들의 용맹한 모습을 표현한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앞 비둘기 떼를 지나 금문교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국영 백화점인 ‘굼’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러시아에 처음으로 생긴 백화점이다.
중앙광장
블라디보스토크 굼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 굼에 대한 환상을 그리며 길을 따라 올라갔다. 낡은 건물 맞은편에 익숙한 ZARA 표지판이 보였다. 사실 잘 때 입을 옷을 너무 두꺼운 것으로 들고왔기에 좀 얇은 실내복을 하나 살까 싶어서 자라에 들어갔다.
타이타닉?
그런데 이 자라 매장이 심상치가 않았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올법한 중앙 계단과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가 ‘진짜 이게 SPA 브랜드 자라 매장이 맞나?’ 하는 의구심까지 자아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가 국영 백화점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무서운 제복과 모자까지 쓴 군인 같은 사람들이 백화점 출입문 곳곳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정말 자라 매장이다
ZARA 매장이 이렇게 큰데 다른 매장을 또 얼마나 휘황찬란할까 기대가 됐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봐도 기념품을 굉장히 비싸게 파는 입구 옆 가게와 이상한 음료 가게, 모피 의류 가게 등을 제외하고는 다른 매장이 보이질 않았다. 건물 안내문을 보는데 3층짜리 건물의 각 층 큰 로비가 모두 자라 매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른 매장들은 로비 뒷편 작은 자리를 나눠서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국영’ 백화점의 가장 좋은 자리를 스페인의 SPA 브랜드 자라에 내 준 러시아. 좀 슬퍼해야 맞는 건지, 아니면 개방적 마음가짐이 대단하다고 해야 맞는 건지 좀 헷갈렸다.
굼 옛 마당 입구
힙스터 공간이 되었다
백화점 안쪽 공간은 ‘굼 옛 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비됐다. 소련 시절에는 창고로 사용됐는데, 도시재생 같은 것을 했는지 블라디보스토크 젊은 사람들을 위한 마니아 공간이 돼 있었다.
벽화들
에끌레어 가게 '프스삐쉬까'
젤라또 가게 '샤릭 마로줴노버'
오래된 건물 곳곳에 재밌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굉장히 ‘힙한’ 미용실, 푸드트럭에서 시작해 성공한 버거집, 젤라또 가게, 한국인에게 인기 만점인 에끌레어집 등이 모여 있었다. 그 중 ‘제대로 된 커피’를 내린다는 ‘꼬페인’이라는 카페에 들어갔는데 정말 현지 젊은이들이 득실댔다. 거기서 시킨 아메리카노, 카페 라떼, 플랫화이트가 모두 맛있었다.
꼬페인. 한참 찾아 헤맸다.
현지 젊은 사람들의 핫플인듯.
6. 블라디보스토크는 미국 여성을 사랑해
커피로 체력을 보충한 뒤 금문교 쪽으로 조금 더 걸어올라갔다. 길 도중에 작지만 화려한 17세기 러시아 양식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체국이 있었고 바로 옆에 모자를 쓴 부인의 동상이 있었다.
우체국
엘레아노르 프레이와 함께
이 여성은 1984년 남편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 온 미국 여성 엘레아노르(엘리너) 프레이다. 엘레아노르는 1930년까지 미국에 살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고 겪은 것, 국가와 도시,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지를 1만6000쪽이나 썼다. 아까 다녀온 박물관에서도 ‘엘리너 프레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기획 전시를 하고 있었다. 엘레아노르의 편지 안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어난 혁명, 전쟁, 내란에 대한 기록은 물론이고 그가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까지 드러난다고 한다. 미국 여성이라고 해서 당연히 편지가 영어로 쓰여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이 알 수 없는 키릴 문자 사이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있는 문서를 보겠구나 기대하며 전시관으로 달려갔는데, 36년 동안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았던 엘레아노르는 러시아어에 너무 능통했다......
미스 엘레아노르 발밑에서 동전을 주웠다
어쨌든, 미국과 냉전시대를 겪었던 러시아 사람들이 미국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도시를 대표하는 국립 박물관에서는 이 미국 여성에 대한 전시가 열렸고 우체국 앞에는 이 여성의 우아한 모습을 동상으로까지 만들어 기리고 있다. 국경과 이념과 냉전을 뛰어넘은 사랑이었다.
7. 알아서 찾아오세요, 잠수함 박물관
사방으로 뚫린 니콜라이 개선문은 그 아래를 통과하면 성공과 행운을 얻는다고 해서 정말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니콜라이 황제로 추정되지만 약간 포세이돈 같기도 한 엄근진 러시아 할아버지의 얼굴도 멋드러졌다.
엄근진 러시아 할아버지
화려한 니콜라이 개선문
문 아래를 얼마나 지나다녔는지 모른다
개선문에서 조금 내려가면 마치 잠시 수면 위로 떠서 정박해 있는 것 같은 잠수함이 한 대 있다. 사람이 들락날락하기에 뭐지 하고 내려갔더니 A4용지 크기로 요금 안내가 적혀있었다. 1인당 100루블 입장료를 받는 잠수함 박물관이었다. 어떤 표시도 없고, 그냥 올 사람만 알아서 오라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박물관인지 어찌 알았으리오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대활약한 잠수함을 1982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955년까지 실제로 쓰이던 잠수함이어서인지 조타실과 잠망경, 사령관실, 어뢰와 함께 수병들이 잠을 자던 좁은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판실 위에 붉은 ‘14’라는 글자가 있는데 러시아가 격추시킨 독일 선박의 숫자라고 한다. 내부에는 오래 전에 러시아 사람들이 고안했던 옛 잠수함의 설계도와 사진, 실제로 장교들이 쓰던 총과 무기, 입었던 옷, 체스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이었다!
총에는 왼쪽 사진 아저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강인한 소련 여성상
배를 타던 중 심심풀이로 뒀을 체스
누가 그렸는지 지금 팔아도 팔릴 것 같은 티셔츠
정말 놀랍게도 관광지 바로 옆에 태평양 함대 사령부건물이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구호를 붙이며 딱딱한 걸음으로 행진했다. 차도 하나를 건너면 거대한 군함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항구가 있다. 군함들이 가끔 큰 기적 소리를 내며 시커먼 엔진 연기를 내뿜는다. 그러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엔진 연기 냄새가 온 도시를 가득 메운다. 어제 밤에는 그 냄새가 좀 역겨웠는데 하루 지났다고 좀 적응이 됐는지 ‘이게 블라디보스토크의 냄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타실 들어가는 거 좀 무서웠다
잠망경 보는 척
1955년에 이런 기계시설이라니
어뢰와 함께 잠을 자는 수병들
관광지 바로 앞의 군함대
8. 괴상한 물건들의 천국
집에 돌아올 때는 중앙광장 윗 쪽이 아닌 아래쪽 해안 주차장 쪽으로 걸어왔다. 삭막한 길 중간에 알록달록한 3층짜리 가게가 보였다. 한국어로도 ‘기념품’이라고 쓰여 있었다. 들어가려 했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왠지 물건을 사지 않으면 안 돌려보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 쭉 더 걸어가다가 막다른 길이 나와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갔는데 그 김에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들어갔다.
그야말로 이상요상함의 천국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들을 사진으로 올려본다.
캐비어를 막 저렇게 판다
러시아 해군을 연상시키는 보드카
마트료시카를 하나 사고싶은데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하나 사고싶었으나 모자 안에 곰팡이가 가득
불곰의 이빨을 판다. 사스가 불곰국
각 나라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을 모으고 있다. 하나 살 예정.
....안 사요....
퍼 프리 시대에 역행하는 털모자들
그러나 조심스레 하나 써 봅니다
너무 예쁘지만 꿈에 나올 것 같다
도도하게 쳐다도 안 보던 고양이
돈을 넣으니까 한 번 돌아봐준다....
소비에트? 군대? 느낌으로 만든 체스 말
오바마와 푸틴 중 누가 체스를 더 잘 둘까요
9. 차가 잘 굴러만 가면 되는 거지
이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어보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자동차다. 일단 90% 이상이 일본 차다. 토요타가 제일 많고 닛산과 혼다도 꽤 보인다. 한국 차는 어쩌다 대우, 현대가 보이는데 다들 미친듯이 매연을 뿜는 오래된 버스, 대형차 뿐이다.
하고싶은 말은 그건 아니고, 깨끗한 차가 정말 한 대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차를 정말 굴러만 가면 되는 이동수단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차가 부서지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테이프로 대충 붙여서 그냥 탄다. 다 깨져있어서 이게 굴러갈까 싶은 차도 갑자기 시동이 부릉 걸리고 출발한다. 오늘 본 차는 정부청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녹색 차였는데 뒷부분이 다 삭아 없어져 있었다. 추측해보건대, 워낙에 눈이 많이 오니 겨울에는 도로 곳곳이 제설제여서 차 밑 바닥이 다들 그렇게 삭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부동항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도 또 다른 이유이지 않을까.
꽁무니가 어디 갔나
??? 차를 어떻게 돌 위에 세워놨지
10. 들어가도 되는 것 맞나요?
블라디보스토크의 또 다른 특징은 건물 입구가 너무 좁다는 것이다. 우리 집만 해도 큰 아파트먼트에 작은 출입문을 지나서 좁은 계단을 따라 오면 또 좁은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우리 집과 옆집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 집은 에어비앤비)
오늘도 음산한 우리집 앞
문제는 손님들 어서 오시라고 해야 할 가게들도 똑같이 문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문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문을 활짝 열어두며 호객행위를 하는 한국과 너무 다르다. 분명히 저게 가게인 것 같은데 과연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들어가도 될지 한참을 망설이게 만든다. 문도 엄청 뻑뻑해서 온힘을 다해 열어야 열린다. 러시아사람들은 역시 우리보다 힘이 훨씬 센 것일까.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무리없이 문을 여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아마 날씨가 너무 추우니 문을 조그맣게 만들고, 또 바람 들어오지 말라고 문틈 사이를 굉장히 빽빽하게 채워놓는 것 같다. 아, 또 문은 항상 밖에서는 당겨야 하고 안에서는 밀어야 한다. ‘당기세요’를 붙여놔도 밀어버리는 한국인들은 늘 헷갈린다.
페이크 창문
예쁘지만 폐쇄적인 건물
그나마 무엇을 파는지 보여주는 가게
11. 표정이 없는 사람들. 날씨를 닮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은 참 표정이 없다. 차갑고 색깔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 표정이 없다고들 하는데 블라디보스토크는 더하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온 사람들은 이 도시 사람들이 ‘무뚝뚝하다’고 말한다.
이 곳에 온 뒤로 나에게 미소지어주는 사람은 딱 한 명 봤다. 숙소에 돌아오기 전에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를 사러 마켓에 들렀는데, 어쩌다 나랑 눈이 마주친 러시아 아저씨가 굉장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줬다. 그 뒤에 아빠와 마주쳤는데 아빠에게 어눌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빠는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았고 아저씨에게 다시 돌아가서 “네, 반갑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외에는 가게 사장님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정말 단 한 사람도 웃지 않는다. 내가 “땡큐” 하면서 웃어도 누구 하나 웃음 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쩜 이럴까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 우산을 쓰지 않고 걷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어쩌면 날씨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코트를 동여매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그러고보니 우중충하고 무채색인 블라디보스토크의 날씨와 똑같은 얼굴들이었다.
다들 이 표정이다
12. 차보다 사람이 먼저
그럼에도 이 도시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이유는 보행자가 보이면 무조건 멈춰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운전 습관 때문이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 중에서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다.
“절대 무단횡단 하지 마세요. 몰랐다고 해도 1인당 1000루블(약 1만8000원)씩 벌금 뭅니다 ㅠㅠ”
감사한 팁 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단횡단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갔는데 좀 난감했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보다 없는 횡단보도가 훨씬 많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교통체증은 강남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경험을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타이밍을 보고 있으면 저 멀리서 아무리 빠르게 달려오던 차라도 슬그머니 횡단보도 앞에 멈추는 게 아닌가. ‘설마 저 차는 안 서겠지, 저 차 지나가고 건너야겠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도 어김없이 차가 섰다. 보행자가 천천히 건너도 누구 하나 빵빵대는 운전자가 없다. 횡단보도 앞에 기다리고 서 있으면 그 특유의 무뚝뚝한 무표정으로 손짓을 하며 먼저 지나가라고 하거나, 고맙다고 목례를 하면 (역시 굉장히 차가운 표정으로) 함께 목례를 한다.
이 표지판만 보면 사람들이 온순해진다. feat.한식당
아마 이 곳 사람들은 외강내유형인가보다. 어쩜 날씨도 그렇지 않나. 밖에서는 살을 에일듯 매서운 바람이 부는데 실내에 들어가기만 하면 정신까지도 노곤하게 만들만큼 따뜻한 난방이 틀어져 있다. 집 주인들은 차가운 날씨를 뚫고 찾아온 손님에게서 코트를 건네 받아 직접 걸어 준다. 물론 아주아주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