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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픽스의 빗치 May 28. 2019

기차표와 양말을 사다

2019.5.28.

2019년 5월 28일 화요일

1. 서울 - 부산 왕복 KTX 열차표
금액: 11만9600원(서울 - 부산) / 11만3600원(부산 - 서울)
영원히 살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 술을 고주망태로 먹고 들어와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온 집안을 호령하던 할아버지가 아프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라 실감이 안 나고 눈물도 안 난다. 간에만 암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니라 폐까지 이미 전이된 데다 나이도 많아서 다시 못 일어나실 거라고 했단다. 동네 종합병원에서 다른 합병증 치료를 받던 할아버지는 내일 더 큰 병원으로 옮겨 간다. 어느 병원에도 중환자실에 자리가 나지 않아 아빠는 며칠 밤을 복도 의자에서 지새우고 있을 거다. 대체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그냥 환자실도 아니고 중한 환자실이 가득 찬 걸까. 서울에서 소식만 듣고 있던 엄마와 나는 드디어 부산에 찾아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든다. 잘 그러지 않는데 이번에는 연차를 써서 내일 부산엘 가기로 했다.

KTX 열차표를 살 때는 대부분 명절 연휴였다. 대체 언제 쉴지를 모르는 즉흥적인 편집국 기자 시절에는 늘 시기를 놓쳐서 입석 표를 끊었다. 사람에 치여 부산까지 장장 3시간 여를 달리다보면 비싼 특실이라도 앉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특실도 매진이다. 이번에 표를 끊는데 일반실은 여전히 자리가 많이 남았는데 오히려 특실이 매진인 시간대가 많았다. 마음이 각박하니 몸이라도 넉넉히 가볼까 하다가 가격에 주춤하고 일반실을 끊었다.

엄마와 나 2인분을 끊었더니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표는 11만 9600원, 부산에서 서울로 내려가는 표는 11만 3600원이었다. 같은 기찻길 똑같은 사양의 열차 같은 일반석인데 6000원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내려갈 때 무거웠던 마음이 올라올 때는 6000원어치만큼 짐을 내려놓고 올라오게 된다는 뜻일까.


2. 무인양품 발목 양말
금액: 4410원

어제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서 굉장히 반가웠다. 더워서 매일 캔버스 운동화만 신고다니다가 오랜만에 비도 오고 그래서 좋아하는 워커 힐을 신었다. 키가 쑥 올라간 느낌이 좋았지만 오른쪽 골반과 다리가 심하게 틀어진 터라 조금 걸었더니 오른쪽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프로페셔널한 어른 여성인 것처럼 보이려고 아픈 티를 숨기며 씩씩하게 걸었다. 속으로는 '내일은 무조건 운동화 신는다!' 외치면서.

오늘 아침엔 호기롭게 흰 운동화를 꺼내신었다. 나가려고 가방까지 들었는데 입은 옷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도저히 그 꼴로 나갈 수 없어서 똑같은 모양에 색깔만 검정색인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티셔츠가 검정색이어서 이번엔 괜찮을 거라 믿었다. 꾸역꾸역 운동화끈을 풀고 또 다시 묶고 거울 앞에 섰는데 꼬락서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필 꺼내 신은 양말 색깔은 또 흰색일 게 뭐람. 마이클 잭슨을 떠오르게 했으나 느낌은 전혀 마이클 잭슨이 아니었다.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괜찮아. 그만 하고 출근 좀 해. 늦어."

엄마의 말에 정말 괜찮은가보다 약간 안도하며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선이 발 쪽으로 갔다. 스크린도어에 비친 내 모습이 정말 말도 못하게 이상했다. 사실 누가 내 신발 및 양말과 옷의 부조화를 신경쓰겠냐마는 난 도저히 포기가 안 됐다. 한 걸음을 떼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점심 시간에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가서 종각역 무인양품엘 갔다. 앞이 막힌 슬리퍼나 샌들이 있으면 그걸로 얼른 갈아 신을 작정이었다. 마침 예쁜 여름용 플랫슈즈가 있어서 집어들려는 찰나, 가격이 무려 5만 원인 것을 발견했다.

짧은 순간 고민이 됐다. 5만 원으로 부끄럽지 않은 8시간을 살 것인지(하필 저녁 약속도 있었다), 8시간 정도만 참고 5만 원을 아낄 것인지.

후자를 택했다. KTX 열차표를 사느라 아침에 벌써 20만 원을 지출했기 때문이다. 월급 들어온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잔액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낄 작정으로 꿍쳐둔 옆 계좌의 20만 원을 땡겨 써버렸다.

신발 옆에는 5000원도 안 하는 발목 양말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10배 더 쓸 돈을 아꼈으니 양말이라도 사자 싶었다. 검정 운동화 위로 애매한 흰 양말이나마 올라오지 않으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러 가지 색깔 중에 오늘 입은 수트 색과 같은 양말을 집어들었다.

사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서 양말을 갈아 신었다. 비주얼적으로 그다지 변화는 없었다. 그냥 발목이 아주 조금 시원해졌다. 사무실에 돌아가서는 사무실용 실내화를 신고 버텼다. 진심으로 '실내화 신고 저녁 약속 갔다가 집엘 갈까' 고민했으나 여전히 검정 하이탑 스니커즈에 새로 산 발목양말 차림이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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