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신천지를 비난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것은 ‘가정파탄’이다.
하지만 정작 개신교 내부에도 가정파탄을 합리화하거나 외면하는 구조가 존재한다.
개혁을 외치지만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조차 잡지 못한 채 방향을 잃은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나는 요즘 개신교가 단순히 “교인이 줄어든다”는 차원이 아니라,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느낀다.
미팅을 위해 방문한 공간들 중 상당수가 간판만 남아 있고,
비어 있는 교회가 흡사 폐허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특히 대구의 3층, 1500평 규모의 대형교회가 통째로 헬스장으로 변해 있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소형 교회가 아니라 대형교회조차 버티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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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인건비 구조가 만든 ‘전도의 공백’
현재 기독교가 전도를 절실히 외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종교보다 성직자 인건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목사: 200~300만 원
신부: 100~150만 원
스님: 70~120만 원
수녀: 40만 원
요즘 교회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면,
월 250만 원이라는 인건비조차 감당하기 벅찬 교회가 많다.
이 구조 속에서 과거 목사들은 전도와 설교를 거의 영업과 품질관리처럼 수행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80~2000년대에는 교세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적절한 방식들이 남았고
그 흔적이 지금도 교회 문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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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개신교의 ‘거울효과’
개신교 강단에서 이단 이야기를 들으면,
이단을 기생충이나 세균처럼 묘사하며 교인을 빼앗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단 내부에서는
의외로 일반인 전도 사례가 많다.
심리 상담 전도, 데이팅 전도 등
지금의 교회에서는 거의 시도하지 않는 방식들이다.
흥미로운 건,
교회에서 초청하는 외부 강사들의 강의를 듣다 보면
스스로를 ‘영성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사이비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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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서 사라진 ‘공감의 철학’
신학생, 목사, 전도사, 독실한 신자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예수와 자신들의 천국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그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공감의 철학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초기에 교회에 다닐 때는 설교가 철학적이었다.
삶의 은유, 인간의 이야기, 가치의 안내가 있었다.
예컨대, "가지치기는 더 강한 가지가 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시 부목사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려 떠나는 것을 은유적으로 암시한 설교였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감리교 내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설교는 단순 성경 해설에 머물고,
철학을 잃어버린 신앙은 결국 예수조차 외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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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잃은 마지막 윤리: 연민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례가 있다.
종교가 다른 노부부 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어떤 기독교인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안 믿으면 할머니 못 만납니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전도인가?
슬픔을 이용해 신앙을 권유하는 이 행위는
종교가 가져야 할 윤리를 상실한 장면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강단 위로 올린 교회는
과연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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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잃은 신앙은 결국 사람을 잃는다
철학이란 결국 삶 속에서 겪는 희로애락을
가치와 의미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의 비판처럼,
영혼을 담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는 그 자리를 잃어버렸다.
신앙의 본질은 ‘교세 확장’이 아니라
‘사람에게 남겨지는 의미’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불교의 사유를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타 종교의 관점을 접하면
신앙이 잃어버린 철학의 자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