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맺고 끊는 일은 내게 유난히 자연스럽다. 덕분에 삶에서 큰 손해를 본 적은 거의 없다.
정에 휘둘리던 20대 초반에는 겨우 네 달 만난 사람 하나 잊지 못해 밤새 뒤척였지만, 지금의 나는 오래 만난 연인조차 흐릿하게만 떠올릴 뿐이다. 희미하고, 멀고, 손 닿지 않는 어딘가에 놓인 느낌.
나는 사람을 잘 보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면 작은 것부터 주며 상대를 확인한다.
‘내가 이만큼을 줬을 때, 이 사람은 얼마나 돌려줄까?’
그리고 돌려받을 때는 내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계산한다.
‘이걸 건넬 때 이 사람의 체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내가 느낀 무게의 1.3배쯤 실려 있었던 건 아닐까?’
이렇게 주고받다 보면 결국 본질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작은 것을 크게 돌려주고, 누군가는 큰 것을 작게 돌려준다. 어떤 이는 부끄러워하고, 어떤 이는 아무렇지 않아 한다. 그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결국 그 사람의 바닥을 말해준다.
이 사고방식은 어느새 내 몸 깊숙이 뿌리내렸다.
피가 지나가는 길마다 새겨진 문양처럼, 내 삶의 틈틈이 그 흔적이 스며 있다.
덕분에 나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본다.
다른 깊이로 느끼고, 다른 결로 생각한다.
때로는 ‘혹시 나는 조금 위험한 사람인가?’라는 의심이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심이 드는 순간, 나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의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멀쩡하다는 증거니까.
본질을 보는 눈은 나를 빠르게 만든다.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성취하고, 빠르게 간파한다.
그리고 그 빠름의 부작용처럼… 나는 조금씩 외로워졌다.
외로움은 어느새 내 직장처럼, 매일 출근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일거리가 되었다.
본질을 꿰뚫는 삶은 멋지고 단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능력이 내게 행복을 건네준 적은 거의 없다.
본질을 보는 일은 필수이지만, 사실 사람은 본질을 모른 채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신앙처럼 현실을 잠시 외면하는 길에서도,
철학처럼 현실을 끝까지 응시하는 길에서도,
결국 인간은 괴로움을 숙명처럼 끌어안는다.
그나마 그 괴로움이 잠깐 멈추는 순간은,
누군가와 무언가를 건네는 시간뿐이다.
내가 조금 주고, 조금 받는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괴로움은 잠시 숨을 고르고, 고요는 아주 짧게 내 곁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