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부 사역 중에 곧 목사가 될 전도사가 여자 선생님 두 명을 “똑부러진다”고 칭찬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말이나 행동이 조금도 틀림없이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그 전도사는 이것을 “아이들이 두려워하고 잘 통제된다”는 의미로 쓰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의문이 생겼다.
언제부터 사랑의 기준이 ‘통제 능력’이 된 걸까?
통제가 필요할 때는 분명 있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이 통제로 대체되는 순간,
우리는 아이들을 ‘성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다.
나는 사랑이란 각자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 전도사에게 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체면을 위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몇 번 농담을 던졌다.
나에게 이런 유머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심리적 거리를 줄이는 장치, 상대의 여유를 보는 테스트, 사람 사이의 흐름을 말랑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하지만 전도사는 내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그러다 “영포티 된다”며 사회에서 고립될 거라고 했다.
그를 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는 부하 직원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 상사를 좋아하는 감정은 ‘진심’이 아니라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는 그 미묘한 긴장과 거리감을 읽지 못했다.
어쩌면 눈치가 이렇게 없으니, 아부와 호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잠시 후 그는 의대에 다니는 사촌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주 행복하다며 자신보다 수준 높은 사람들을 은근히 낮추어 말했다.
그 순간 그의 행복은 단단한 기쁨이 아니라, 비교 위에 세워진 불안정한 탑이라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 친구야, 너보다 잘난 사람들은 네 행복에 애초에 관심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