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님의 말과, 나의 사회성 때문에 초고지능을 의심했다는 형의 말을 들으면서 ‘사회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사회부적응자라기보다는 **‘사회 과적응자’**에 가깝다.
사회적 규범과 분위기에 맞추는 데 능숙하다 보니 피로감이 누적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맞출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사회지능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그중 최상위 단계로 꼽히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린아이들과 능숙하게 대화하는 능력이다.
아이들은 눈치나 사회적 완충 장치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투·표정·에너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한다는 것은 비언어적 감각, 감정 조율 능력, 상대 기분을 읽는 민감도가 매우 높다는 뜻이다.
둘째는 영업 능력이다.
영업은 단순히 말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의 니즈 파악, 타이밍 조절, 권위 사용, 신뢰 형성, 감정 관리까지 모두 포함된 고도의 사회지능 작업이다.
어느 하나 엇나가면 실제로 사업의 손익이 바로 흔들릴 정도로 복합적이다.
나는 이 사회성을 ‘켜놓을 때’와 ‘꺼놓을 때’를 명확히 구분한다.
사회성을 켜는 경우는 두 가지다.
1. 첫인상을 만들어야 할 때
2. 또래가 아닌 집단에서 역할과 책임이 주어져 있을 때
반면, 또래나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굳이 사회성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맞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맞추는 건 비효율적이고,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본성이 드러나 누구와 맞고 안 맞는지 자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영업할 때 이미 사회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모한다.
영업은 일종의 ‘고밀도 사회적 퍼포먼스’라,
짧은 시간 안에 집중력·감정 조율·상대 분석을 모두 풀가동해야 한다.
그래서 사적인 영역에서는 그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람들이 나에게 농담처럼 “영포티”라고 할 때도 나는 불쾌하지 않다.
그 말은 최소한 내가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한 흔적이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걸 불편하게 받아들인 쪽의 태도가 맞지 않았던 것뿐이다.
농담이 재미없는 경우는 던진 사람의 능력보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결국 나는 사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을 ‘전략적으로 선택해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