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나는 인복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느껴왔다. 내가 죽었을 때 찾아와 진심으로 슬퍼해줄 사람은 기껏해야 서너 명 정도일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무엇을 하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신 적이 없었다. 단지 간섭하지 않는 방식, 어쩌면 그들만의 믿음이 담긴 사랑의 형태였을지 모르지만, 가끔은 기대고 싶을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서운함과 원망이 뒤섞이곤 했다.
친형은 나에게 자격지심이 깊었다. 크고 작은 것들을 가져가고 싶어했고, 그것 때문에 사소한 갈등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사이는 나쁘지 않다. 형은 순하고 나는 거칠지만 정이 많아서, 서로의 결이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관계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사실상 왕따였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한두 명뿐이었다. 누군가 시비를 걸면 참고 참다가 어느 순간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 시절의 분위기는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견디기 어렵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내게 주먹은 공격이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였다.
그럼에도 몇 명이라도 진심으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내 삶은 완전히 고립되거나 무너져버리진 않았다. 오히려 작은 인간관계 덕분에 받는 스트레스가 적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 스스로도 과한 면이 많은 사람이기에, 이 정도가 신이 허락한 적절한 인간관계의 크기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직원복만큼은 나에게 후했다. 그들의 속마음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주는 직원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그 마음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그들을 더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끝없이 올라온다.
얼마 전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여직원에게 성과급을 주었다. 다른 대표였다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노고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녀의 삶 곳곳에서 그녀를 인도하는 그녀의 신께 예배를 드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감사하다”, “오래 다니고 싶다”라는 말은 상사가 듣기 좋은 형식적 말일 수도 있기에, 온전히 믿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영포티’라 부르는 것도 어쩌면 합당한 일일지 모른다.
입사한 지 한 달 된 영업사원 역시 내가 준 숙제를 끝내며 합격에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그가 풀 수 있도록 문제를 뒤에서 살짝 조정해두긴 했다. 하지만 의지가 없으면 절대 풀 수 없는 과제였고, 그는 자신의 사적 시간을 써가며 회사 몰래 노력하고 있다. 그 성실함이 고맙지만, 한편으론 과하게 자신을 소모하지 않길 바라는 작은 걱정도 든다.
가장 밑바닥이라 생각했던 인복이, 30대 중반에 이르고 나니 조금씩 내게도 허락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과욕을 조금 부려본다면, 언젠가는 좋은 반려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부유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나와 철학이 달라도,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좋은 사람이라면 충분하다는 오만한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