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개신교인에게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또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만약 이 감정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운명적 과제’라면,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신학을 다시 펼쳤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예전에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오래 고민한 적이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익숙한 이 문장을 붙들고, 나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해석해보았다.
예수의 성품을 지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안에 머무는 성령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
이 관점은 놀랍게도 불교의 내면 성찰 구조나 철학적 사유와도 깊이 닮아 있었다.
삼위일체는 초월적 기적의 구조가 아니라, 성찰의 프레임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그런 관점에서, 한 전도사가 내게 물었던
“3일 후 부활을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많은 성직자들에게 이 문장은 모태신앙적 확신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너무나 자명하지만, 무신론자인 나에게는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믿는다는 말의 본질’**이 더 중요해 보였다.
나는 그 질문을 결국 이렇게 번역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성품을 배우려는 의지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즉 믿음은 초월적 사건의 사실성을 확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품을 삶 속에서 선택하려는 태도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도 성경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허구’라고 말하면 기분이 상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과 감정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감정적 단절이 기독교 사회와 일반 사회 사이에 깊은 간극을 만든다.
성경의 언어는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해석의 폭은 어떤 성직자를 만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잘못된 성직자를 만나면 신앙은 배타성과 폐쇄로 흐르고,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배타당하기 쉽다. 그러나 건강한 성직자를 만나면 믿음은 더 보편적인 관점으로 확장되고, 전도 역시 강요가 아니라 이해의 과정이 된다.
결국 무신론자인 내가 보기에, ‘믿는다’는 것은
기적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성품을 자신의 삶에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의 고백이다.
믿음은 신을 향한 선언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