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보고 문의드립니다.
인스타그램에 있는 그 브랜드, 저랑 친한 친구인데 그걸 보고 연락드려요.”
그런 말을 들었다.
사실 그 글은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내 인스타그램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올린 글이었다.
월 기준으로 고객군 조회수만 약 30만 정도가 나오니,
그만큼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누군가를 돕기 위해 써 둔 글로
내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순수한 이타심이었을까.
아니면, 그 대표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는 이기심이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 순간 문득 성경의 한 구조가 떠올랐다.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논리.
이기적으로 굴면 망하고,
이타적으로 굴면 흥한다는 이야기.
성경을 들여다보며 내가 자주 느끼는 감각은 이것이다.
이 책은 보편진리를 매우 설득력 있게 포장해
사람들에게 실제로 이롭게 작동하도록 만든 텍스트라는 느낌.
그게 내가 이해한 개신교의 핵심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성경은 생각보다
아주 강한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심약한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에 가깝다는 인상.
이 책의 내용을
‘절대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삶을 버티기 어려운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더 자주 체감한다.
몇몇 개신교 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생각에까지 이른 적도 있다.
만약 이 사람들이 교회라는 구조 안에 있지 않았다면,
다른 형태의 믿음 ―
이를테면 무속이나 점술 같은 곳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렇다면 질문은 여기로 이어진다.
개신교는 혐오할 만큼 나쁜 종교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
정보와 통신이 발달하고,
각 종교의 차이와 구조를 비교해보면
대부분의 종교가 말하는 핵심 진리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진리를 어떤 문화적 언어로 표현하느냐,
그리고 어떤 의례와 제도로 유지하느냐 정도다.
결국 종교가 비추고 있는 것은
신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악함과 약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의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종교란,
상대적인 보편진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견디게 만드는 장치라고.
나는 그 장치를
맹목적으로 붙잡고 싶지도,
조롱하며 버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조금은 차분하게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