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그만두면서 몇 가지 이유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는 한 달 가까이를 술독에 빠져 살았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 번화가에 나가 취할 때까지 마시고 집에 돌아와 쓰러지듯 잠드는 생활이었다.
직장인이었다면 회사라는 최소한의 제약이 있었겠지만, 나는 대표였다.
강제성이 없다는 것은 무너질 자유도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그 자유 때문에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술을 마시러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아, 어느 날 술모임 하나에 나가 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오는 모임이었다.
다들 형, 누나였고, 처음 온 나와 연예인처럼 생긴 또 다른 초면의 여자분은 유난히 깍듯한 환영을 받았다.
반면, 자기 관리가 안 되고 눈치 없는 형 한 분은 자연스럽게 외면당했다.
아마 애정 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피하면 더 말이 많아지는 악순환.
가끔 내가 옆에서 말을 걸어주면 그는 유난히 기뻐하며
“자기랑 놀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결혼이 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반복했다.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군대 후임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는 데 2,100만 원 들었다는 얘기를 꺼내며 권유를 해봤다.
그는 꽤 진지한 눈빛과 제스처로,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용히 이 모임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는 분에게 가서
“그 형이 좀 서운해하시는 것 같더라”고 전하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친목 모임도 결국 사회예요.
살아남는 사람이 살아남는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 모임에서 오래 활동한 사람들은 다 비슷한 말을 했다.
어차피 일은 사필귀정이고,
내가 아무리 챙겨주려 해도 챙겨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챙긴 건 정말 그를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동정함으로써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기심은 아니었을까.
다음 날 아침, 그 형은 그 모임을 나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무언의 적자생존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