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서 돌아가는 길

by 삶 집착 번뇌

와인 소개팅이 아니라 와인 모임을 갔다.

사실 소개팅이든 모임이든 상관없이,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결혼을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다. 그 점이 오늘도 가장 신기했다.


와인 모임에 가는 길, 버스 옆자리에 한 여자분이 앉아 있었다. 그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내리는 정거장이 같아서였을까.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부담스럽게 아는 척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죄송한데 기억이 잘 안 나요”라고 말하며 낯을 가렸다.


와인이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쯤 들어가자 몸과 말이 조금씩 풀렸다.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 저런 질문을 던졌고, 요즘 내가 붙들고 있는 연애 철학과 결혼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 정리해두었던 일곱 가지 논제 중, ‘비혼주의자는 정말 비혼주의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애매한 명제에 대해 의외로 많은 공감을 얻었다. 대부분의 명제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도 취해 말이 많아질 무렵, 시간은 흘러 흠뻑 취하고 젖은 채 즐거운 술자리로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길, 신촌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옛 애인들과 친구들과의 정취, 눈발 흩날리는 가로등 아래의 시선, 교회 앞에 머물던 순간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추억이 되어 있었다.


눈이 날리며 집으로 향하는 길, 한때 사랑했던 옛 연인들이 떠올랐다.


같이 수학 과외를 하던 수학 선생님의 딸, 약대생, 공부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던 친구, 나를 중국어 공부로 이끌었던 외국인, 나와 나이 차가 있던 연상녀, 나를 교회로 인도했던 어린 그녀,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알쏭달쏭했지만 나를 붙잡던 그녀, 대구에 살던 그녀, 그리고 연인은 아니었던 그녀까지도.


가로등 아래에서 흩날리는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우리는 저 아래에서 뜨겁게 입을 맞추고 있었고, 세상엔 너와 나 둘뿐이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이제 나는 혼자다. 몇몇은 시집을 가서,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연애와 결혼을 깊이 탐구 중인 나는, 결혼할 때까지만 쓸 일회용 철학을 고민하고 정리하며, 아주 잠깐만 그것을 적용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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