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두 명을 고용했다. 원래는 남자 두 명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 한 사람은 아내와 함께 일하겠다며 현장에 아내를 데려왔다.
나는 여자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적인 영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일을 잘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힘을 써야 하는 현장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현장에 나온 남편의 무게감과 태도였다.
그는 아내를 대신해 앞에 서 있었고, 아내는 그 뒤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부부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부부는 단순히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지지해주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부부의 관계는 꽤 이상적이었다.
그 관점으로 내 과거를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 하나씩 함께 쌓아가고 싶다’는 나의 이상형이 지극히 이기적인 말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랑했던 신학생, 다섯 자매의 막내였던 그 친구 역시 나와 결혼했다면, 사랑보다는 수준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관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꽤 큰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을 둔 아내들이 느끼는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종종 들어왔다. 대치동에서 이대·연대·고대를 나온 어머니들 사이에서, 전문대 졸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트레스를 겪다 결국 이혼에 이른 사례들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환경에서 잘 사는 것이 반드시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돈이 많고 잘난 남편을 두는 것보다, 인품이 단단한 남편을 두는 편이 그들에게는 더 맞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지금, 나는 어떤 확신이나 논리보다도 거의 신앙에 가까운 감각으로 부부를 관찰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은 점점 더 선명하고 견고해진다.
마치 피그말리온이 조각을 다듬듯,
그 조각의 마지막에 사람이 나타나길—
아주 작은 소망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