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며, 한 외국인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른다.
산사태로 집이 무너졌고, 그 즈음 회사에서 해고를 당해 결국 파산까지 했다는 이야기. 그 일들을 겪은 뒤 그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도망치듯 이곳에 왔다고 했다. 아직 20대인 그에게는 너무 큰 일이었을까. 아니면 40대나 50대에게라면 더 큰 일이었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다.
딱히 해줄 말이 없던 나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성직자처럼
“신이 널 축복할 거야”
라는 말을 건넸다. 아무런 책임도 들지 않고, 이후의 결과에도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말. 위로라기엔 지나치게 가벼운 문장이었다.
그가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제발.”
그 한 마디가 그가 서 있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애쓸 때, 세상은 적어도 완전히 적대적으로만 보이진 않는다고. 반대로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흘러가면, 세상은 쉽게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그러니 결과가 아니라 태도만큼은 포기하지 말아보라고.
세상에 가벼운 삶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무게의 절망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이 널 축복할 거야’라는 말조차도 완전히 무가치한 위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순간에, 그 말은 최소한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였을 테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목사의 기도를 값지게 느끼는 걸까. 왜 담임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부탁하며 매달릴까. 그들이 붙잡고 싶은 것은 정말 신일까, 아니면 신을 대신해 절망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손일까. 그들에게 목사라는 존재는, 신앙의 대리인일까 아니면 마지막 증인일까.
그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