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by 삶 집착 번뇌

​27살,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입사했던 나는 30살이 되던 해 사내 정치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워커홀릭으로 살며 '이렇게 일할 바엔 혼자서도 충분히 먹고살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퇴사 당일, 나는 참치 오마카세를 먹고 클럽에서 홀로 양주를 마시며 나름의 짧은 방황을 즐겼다. 그리고 바로 그날, 가장 눈부신 나이인 24살의 그녀를 만났다. 나보다 6살이나 어렸던 그녀를 오랜 설득 끝에 만났고, 우리는 흔한 '썸'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달에 한 번꼴로 흔들리는 속마음을 내비치곤 했다.

"우리의 연애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오빠가 크리스천이 아니라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빠랑 결혼하고 싶은데 그게 너무 무서워"라고 덧붙이곤 했다. 결국 우리는 그 종교라는 현실적인 장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끝없는 사업 실패와 중소기업에서의 부적응, 거듭된 창업 실패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 그녀에게 청혼할 용기조차 있을 리 만무했다. 대기업 생산직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녀에 비해, 나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지 어느덧 3년. 그사이 나는 단순한 자영업을 넘어선 나만의 견고한 비즈니스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제는 남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궤도를 훌쩍 넘어선 수준에 도달했지만, 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나의 모자람을 기꺼이 안아주고, 가장 망가지고 화려하지 않았던 밑바닥의 나를 사랑해 주었던 그녀가 이제 내 곁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 내 삶에는 그때 그토록 원했던 번듯한 안정감이 자리 잡았지만, 정작 이 모든 걸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은 없다. 늦은 밤 마포의 사무실을 나서며 무심히 바라보는 화려한 야경처럼 내 현실은 눈부시게 변했는데, 나의 가장 비참했던 시절을 어루만져 주던 그 작은 온기만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는 사실만이 흉터처럼 남았다.


​만약 그때, 내 미래가 이렇게 단단해질 줄 미리 알았더라면.

만약 그때, 내가 나 자신을 조금만 더 믿었더라면.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무너진 내 등을 너에게 한 번쯤 기댈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부질없는 가정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 친구를 온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다 된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등을 맞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