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태초에 무가 있었다.
그 무는 단순한 공허가 아니었다.
내게는 돌봄의 부재, 손길의 결여, 감정의 빈자리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아 주는 팔과 눈 맞춤 속에서 자라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비워 둔 채 자라났다.
돌봄 없이 자란 아이는 자라서도 흉내로 산다.
사랑을 흉내 내고, 친절을 흉내 내고,
말투를 흉내 내고, 자세마저 흉내 낸다.
겉으로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커 가지만,
내면은 여전히 텅 비어 있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더 크게 몸을 벌리고, 더 많이 움직이며,
마치 성장하는 듯 보이려 애쓴다.
이 모습은 실제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루마니아의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음식과 옷은 제공받았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눈길이나 품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래서 키는 자랐지만, 언어와 감정은 크게 지체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도 관계를 맺는 데 깊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 다른 유명한 사례로 ‘지니(Genie)’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13세까지 아버지에게 감금되어, 말소리조차 거의 듣지 못한 채 성장했다.
살아남기는 했지만, 언어와 감정 표현은 거의 닫혀 버렸다.
그의 삶은 인간 발달에 반드시 ‘돌봄’이라는 자양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나는 문득 우주를 떠올린다.
1965년, 벨 연구소의 두 과학자는 위성 통신용 안테나 앞에서
정체 모를 잡음을 발견했다.
어디서나 들려오는, 지워지지 않는 소리였다.
그것은 단순한 잡음이 아니라,
태초의 불길이 남긴 메아리 — 우주배경복사였다.
우주는 한때 뜨거웠고, 지금은 식어 가며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그 팽창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미 있던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그래서 우주는 커지지만, 동시에 더 텅 비어 간다.
혹시 나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성장하려 애쓰지만,
사실은 단지 팽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태초의 뜨거움과 단단함을 아직도
양분으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장은 내면에 새로운 구조가 생겨나는 일이다.
관계와 감정이 이어지고, 의미가 쌓이며,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자라나는 과정이다.
그러나 팽창은 다르다.
겉은 넓어지지만, 안은 그대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차이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빛은 멀어질 때 붉어진다.
천문학자들은 이것을 적색편이라 부른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별과 은하가 서로 멀어지는 흔적,
그 빛은 길어지고 희미해져 붉은 쪽으로 기운다.
내 가슴도 마치 그런 붉은 파장으로 가득 찬 듯
아려온다.
이 우주의 팽창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팽창이 끝나면 수축밖에 남지 않는 것일까.
아아 우주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되었든 나를 뜨겁게 달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