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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 Kim Mar 22. 2016

귀향

Spirits' homecoming

I overheard one american couple's conversation behind me "comfort women, it sounds like too euphemism for korean women who had to go through all the relentless things, since "comfort women" is from point of view from Japanese who try to justify what they did. "
I didnt realize we should be careful even in trivial terminology till this point.
It kind of reminded me of the time i watched "son of saul" with Tim in NY, which is about a man's life living as a Sonderkommando, who were mostly jews and were forced to aid with the disposal of gas chamber victims during the holocaust. And in that Cinema, there were mostly people who looked like really zealous with learning what happened cruelly in the past with earnest wish for this absurd things not to be repeated.

I kept thinking of history teacher who i really admired, who used to say without putting any effort(not trying to know what happened), do not dare ride a train of History, do not take it for granted what you have.

I used to think that there was nothing I could actually do for making a difference but this movie's existence itself broke all the mindset of mine completely. This movie was miracle itself made by individuals little by little donation rather than by big dominant company in a movie industry sometimes which could focus only on how much money they could make by specific movies. People who naively have believed that even if their little trivial effort and heart could be a big change, influence in a positive way at last being accumulated enough. By the number of 72,279 individuals, for 14 years for this movie to be released, by donation of talent from actors and actress, this movie came out wishing every time one person watch this movie, the spirit of the dead who had to encounter their death far from home could come back at last.

Movie itself was more complicated than I expected. The title song 'Would you go' was what I learned in high school which means I need certain degree of translation for understanding it. And there was shaman rituals of folk belief for memory of the dead, which could korea's traditional aspect in a cultural way. And when I encountered a character whose dialect sounds like obviously north kroean, I came to realize again that we were together at that time.

What I felt from this movie was tangled up with various things which I couldn't even describe. I just cried from the beginning of the movie till the end. Also I was so grateful to people who are not korean who were watching this movie in the cinema making an effort to know about what really happened.

‘귀향’ 영화를 보고 나서 엔딩크레딧 올라가자, 내 바로 뒤에 앉았던 미국인 노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위안부, 참 너무 미화된 단어인 것 같다. 그 모든 잔인한 과정들을 거쳐야 했던 한국인 분들에겐 너무나 미화된, 너무나 일본인 입장에서 정의 내려진 단어인 것 같다.” 라는 대화를.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위안부”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백과사전에서 단어 정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나 일본인들 입장에서 정의내려진 단어이기에, 쓸 때마다 우린 큰따옴표를 붙여주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노예자 라는 단어는 너무나 어감이 강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더욱 상처를 만들어주기에 이 단어 또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귀향” 영화관의 풍경은 내가 뉴욕에서 'son of saul' ‘사울의 아들’을 봤을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 극장에서 팀이랑 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다들 노부부, 어르신들(추측하건데, 그 세대를 살으셨던 분들) 이 대다수였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부은 눈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희생당하신 분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가졌던, 신성한 의식의 일부 같았던 그 극장이 떠올랐다. 한국인들이 아닌 외국인들이 참 많았다. 누가 봐도 정말 미국인인 그런 노부부들도 참 많았다. 의외였다. 영화가 끝으로 향해가는 즈음, 우리 모두는 울고 있었다. 국적에 상관없이. 정말로 일어난 그 사실 자체만을 바라보며 일본에 반감을 가지기보다는, 더 보편적으로 ‘전쟁’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또한 내가 인강을 듣곤 했던, 최태성 선생님을 정말 많이 떠올리게 했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던 선생님. 영화관 통째로 빌려서 ‘귀향’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는 뉴스를 보면서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최태성 선생님. 우리의 큰별 쌤”

사실 많이 회의적이었다. 어떤 큰 역사적 사건에 내가 현실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 영화 존재 자체는 그런 내 생각 자체를 모조리 부셔버렸다.  이 영화는 기적 그 자체처럼 보였다. 75,279명 개개인들의 후원으로, 또 연기자들의 재능기부로, 14년이란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과 오랜 시간의 결과 그 자체였다. 조정래 감동의 “영화를 한 분 한 분이 더 보실때마다 외로운 먼 땅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했던 분들의 넋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라는 말씀이 참 와 닿았다.

영화 내용 자체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였다. 영화 리뷰를 찾아봤을 때, ‘연기력이 부족해서 집중하지 못했다’ 혹은 ‘구조가 탄탄하지 않다’ 라는 글들을 봤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토속 신앙 샤머니즘(이 단어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보고 단어를 적는 것 자체가 몇 년만이다)이 현제 시점의 사건들을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의 고통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누가 봐도 북한 억양으로 말을 하는 소녀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 우리 그땐 하나였지...”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엉키고 엉켰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었다. 영화 보는 내내, 많은 사람들이 훌쩍 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아닌 분들에게 새삼 고마웠다. 영화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을텐데, 기꺼이 알고자 영화관까지 와 준 노력에.

cgv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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