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한정판 다이어리
나는 왜 뜯지도 않을 텀블러와 다이어리를 샀을까?
필요(Needs)가 아닌 욕망(Wants)을 사는 시대
내 방 한구석 수납장에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 아니, 상자'들'이 있다.
아직 박스조차 뜯지 않은, 포장지째 고이 모셔둔 텀블러와 다이어리들이다.
여름에는 파란색이 시원해 보여서 샀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빨간색이 설레어서 샀다.
프로모션으로 나오는 "이번 시즌 한정판입니다"라는 말은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주문과도 같았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실 컵이 없는가? 아니다.
메모할 종이가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미 차고 넘치는 텀블러와 다이어리를 또 결제했을까?
지금은 소비를 많이 자제하고 있지만, 쌓여있는 저 박스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마케터로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산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텀블러가 아니라 '기분'을 샀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소비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하지만 마케팅의 세계에서 인간은 지극히 감정적인 동물이다.
텀블러를 살 때, 나는 단순히 스테인리스 컵을 산 것이 아니다.
그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일하는 '세련된 나',
한정판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그날의 기분'을 산 것이다.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12월만 되면 화려한 다이어리들이 춤을 춘다.
집에 쓰다 만 다이어리가 수두룩하지만, 우리는 새 다이어리를 산다.
왜냐하면 그건 종이 뭉치가 아니라,
내년에는 더 계획적으로 살고 싶은 나의 의지이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니즈(Needs)'와 '원츠(Wants)'의 차이로 설명한다.
• Needs(필요): 목이 말라 물이 필요하다. (기능)
• Wants(욕망): 기왕이면 예쁜 텀블러에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 (감성)
현대 사회에서 기능적인 결핍은 거의 해결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을 채우기 위해 지갑을 연다.
나의 뜯지 않은 텀블러 박스들이 그 증거다.
마케팅,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앞으로 이 글을 통해 나는 마케팅이라는 안경을 쓰고
나의 일상과 소비를 들여다보려 한다.
1+1 행사에 홀려 필요 없는 과자를 집어 든 이유,
넷플릭스 썸네일에 낚여 밤을 샌 이유,
그리고 1인 기업가를 꿈꾸는 내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저 수북한 텀블러 박스들이 나에게 알려준 교훈은 명확하다.
"사람은 이성으로 생각하고, 감성으로 결제한다."
그 미묘하고 재미있는 심리의 줄다리기를 이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혹시 당신의 방 한구석에도 뜯지 않은 택배 상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