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나는 왜 뜯지도 않을 텀블러를 샀을까

feat. 한정판 다이어리

by 가비야

나는 왜 뜯지도 않을 텀블러와 다이어리를 샀을까?

필요(Needs)가 아닌 욕망(Wants)을 사는 시대


​내 방 한구석 수납장에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 아니, 상자'들'이 있다.

아직 박스조차 뜯지 않은, 포장지째 고이 모셔둔 텀블러와 다이어리들이다.

​여름에는 파란색이 시원해 보여서 샀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빨간색이 설레어서 샀다.

프로모션으로 나오는 "이번 시즌 한정판입니다"라는 말은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주문과도 같았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실 컵이 없는가? 아니다.

메모할 종이가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미 차고 넘치는 텀블러와 다이어리를 또 결제했을까?


​지금은 소비를 많이 자제하고 있지만, 쌓여있는 저 박스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마케터로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산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텀블러가 아니라 '기분'을 샀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소비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하지만 마케팅의 세계에서 인간은 지극히 감정적인 동물이다.


​텀블러를 살 때, 나는 단순히 스테인리스 컵을 산 것이 아니다.

그 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일하는 '세련된 나',

한정판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마시는 '그날의 기분'을 산 것이다.


​다이어리도 마찬가지다.

12월만 되면 화려한 다이어리들이 춤을 춘다.

집에 쓰다 만 다이어리가 수두룩하지만, 우리는 새 다이어리를 산다.

왜냐하면 그건 종이 뭉치가 아니라,

내년에는 더 계획적으로 살고 싶은 나의 의지이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니즈(Needs)'와 '원츠(Wants)'의 차이로 설명한다.


​Needs(필요): 목이 말라 물이 필요하다. (기능)

• ​Wants(욕망): 기왕이면 예쁜 텀블러에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 (감성)


​현대 사회에서 기능적인 결핍은 거의 해결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을 채우기 위해 지갑을 연다.

나의 뜯지 않은 텀블러 박스들이 그 증거다.


마케팅,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앞으로 이 글을 통해 나는 마케팅이라는 안경을 쓰고

나의 일상과 소비를 들여다보려 한다.

​1+1 행사에 홀려 필요 없는 과자를 집어 든 이유,

넷플릭스 썸네일에 낚여 밤을 샌 이유,

그리고 1인 기업가를 꿈꾸는 내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까지.

​저 수북한 텀블러 박스들이 나에게 알려준 교훈은 명확하다.

"사람은 이성으로 생각하고, 감성으로 결제한다."

​그 미묘하고 재미있는 심리의 줄다리기를 이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혹시 당신의 방 한구석에도 뜯지 않은 택배 상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