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는 사치다.

경연 프로그램이라는 예방주사

by 가비야

요즘 나의 고정 픽은 '미스트롯 4'와 '현역가왕 3'이다. 사실 나는 트로트라는 장르의 광팬은 아니다.

그런데도 매주 본방 사수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피 튀기는 삶의 경연'이 있기 때문이다.

경연 프로그램은 인간사가 압축된 비빔밥 같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다 버무려져 있다.
누군가의 가창력이 몇 점인지, 이번 주 순위가 몇 위인지는 나에게는 부차적인 문제다.
내 시선을 붙잡는 건 무대 위에 선 이들의 눈빛에 서린 '간절함'이다.
그곳에는 대충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십수 년의 무명 시절을 견딘 베테랑부터,

이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로 배수진을 친 신인까지. 마이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서,

나는 그들이 이 무대를 위해 쏟아부었을 눈물과 밤샘의 시간을 읽는다.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은 듯한 그들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늘어져 있던 나의 자세가 절로 고쳐진다.

사실 요 며칠 '슬럼프'라는 핑계로 마음이 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아, 요즘 좀 지치네", "의욕이 예전만 못해"라며 우아하게 슬럼프 타령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사활을 걸고 고음을 내지르는 출연자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인생을 걸고 노래하는데, 나는 고작 이 정도에 슬럼프라고?'
갑자기 나의 슬럼프가 부끄러워졌다.
아니, 슬럼프라는 단어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출처.TV조선 미스트롯4

누구 하나 허투루 살지 않는 그 치열한 현장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내 안의 엔진도 다시 예열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무대는 "너는 지금 충분히 간절하니?"라고 묻는 날카로운 질문과도 같다.
나에게 경연 프로그램은 단순한 예능이 아니라,

'동기부여 수액'이다.

슬럼프라는 이름의 게으름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그들의 열정을 한 사발 들이키고 나면 다시 열심히 살아야 할 당위성이 가슴속에서 솟구친다.

AI 공부도, 마케팅 전략도, 영상 편집도 다시 한번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전의가 불타오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트롯 경연을 본다.
나의 나태함을 꾸짖고, 내 삶의 텐션을 팽팽하게 조여주는 가장 가성비 좋은 '슬럼프 예방주사'.
자, 주사 한 대 맞았으니 이제 다시 나의 무대로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