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전까지는 '참'이었는데 알아버린 순간 '거짓'이 되는 일을 또 당했다.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것을. 어처구니없는 기습공격이다. 속수무책 당해야 하는 게 억울하다. 억울한 게 당연한 것이 되려면 속인사람의 고의성이 분명해야 하는데 이게 병의 증상이라니 어쩌겠나. 처참하다. 억울함과 분노의 힘으로 병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면 최대치로 발악을 하겠지만. 어쩌랴. 그저 당한 내가 내 마음 하나 잠잠해지기 위해 에너지를 끌어모은다. 기습공격 시 대처방법은 오로지 이거 하나다. 자기가 자신을 다독이는 일.
페허.
날마다 <하루하루에 살자>와 갬아넌 교본으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번에 무장해제.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이건 아니지,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고 해도 자신을 다독이는 일은 쉽지 않다. 무너지는 건 순간이어도 복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불 뒤집어쓰고 울음을 쏟아내면 가까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건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 마음보다 몸이 더 깊이 내려앉아버린다. 내가 나더러 실컷 울라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울음 없이 명치끝이 아파온다. 사라졌던 게 재발했다.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마음밭이 드러나면 명치끝의 통증은 더 심해진다.
불행 중 다행.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궁지에 몰렸을 때 찾아갈 누군가가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아들은 퇴근하고 아버지뻘이 되는 GA협심자를 찾아갔다고 했다. 도박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도박을 했지만 재발사실을 숨기고 GA모임에 나왔다고 말하고 조언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의 조언으로 '곧바로 부모님 집에 찾아와 이실직고'를 하게 된 것이다. 아들의 재발을 알게 된 다음날 연락처를 물어 그분과 통화를 했다. 그제야울음이 터졌다. 참다가 터진 게 아니라 '같은 아픔을겪는 사람'의 참말이어서, 그만.
"정상인처럼 생각하면 안 되십니다. 잘 아시잖아요."
뜨끔했다.
'통제가 안 되는 병이었지. 맞다, 지독한 거짓말이 증상이지, 너를 속였다는 게 그렇게 억울했냐.
아직 멀었네. 너 아직도 '정상적인 삶'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아빠가 더 충격받으신 것 같네요. 형을 암환자라고 생각하세요. 어쩌겠어요."
위로가 되진 않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며칠 뒤 퇴근하고 집에 들른 막내가 형의 재발 소식을 들고 던진 말이다. GA 100일 잔치에 가서 눈물의 포옹까지 했는데 그게 다 연극이었다니 저도 충격이었으리라. 식구들 모두 거짓 드라마의 등장인물이었던 거고. 대본 감독 없이도 주인공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서 진짜라고 믿었던 거고. 그래서 감동하고 감명받았던 거고. 주변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대담해졌던 거고. 맨 마지막 '충격적' 반전이 있었던 거고.
아직.
아직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연락도 없지만 연락이 와도 당분간 얼굴을 보는 게 힘들 것 같다. 아무리 병에 걸린 환자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니까. 아들을 상담해 주신 GA협심자 분은 '누가 뭐래도 본인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맞는 것은 알겠는데 지금 엄청 힘들어할 것 같긴 한데. 난 거짓말에 대해 죄책감이 없는 태도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게 아무리 도박병의 증상이라고 해도.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아무리 환자여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 사과받고 싶은가 보다.'
가엾은 아이.
꿈을 꾸었다. 난간이 없는 폭이 좁은 외길 낭떠러지를 걷는데 양쪽은 파도가 거친 바다였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냥 떨어져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하는 순간 잠에서 깼다. 또 꿈을 꿨다. 곁에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길에서 아들을 만났던 거다. 친구는 한발 뒤로 물러섰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아들은 절뚝거리고 양손과 어깨에 짐을 잔뜩 지고 있었다. 뭐라고 주고받은 이야기를 없었는데 그게 내 생각에는 도배일을 하는 장비들처럼 보였고 서로 갈길을 가고 헤어졌다. 그리고 또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네댓 개의 꿈을 꾼 것 같다. 나보다 남편이 먼저 깨서 나를 깨웠다. 이런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여기면서. 출근하면서도 현관에서 한참을 쳐다보고는 출근했다.
도박중독의 세계와 아닌 세계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는 것 같다. 공유될 수도 없고 알기 힘들게 하는 장벽, 넘나들기 힘들다. 그 세계에 대한 공부와 거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하단 걸 알지만 나는 아들의 고통에 가닿을 수가 없다. 얼마나 더 공부가 무르익고 연민이 깊어져야만 가능할까. 영영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럴까봐 겁난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너는 너, 나는 나대로 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고. 곁에 머물러 줄 주는 있어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 각자 자기 삶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건가. 이게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법인건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