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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달 Sep 18. 2024

정상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질병 그 자체는 예측가능성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상의 상실을 이야기한다."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이어서 또 한방.


"질병은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아서 프랭크의 <몸의 증언>에서 보란 듯이 두 방을 얻어맞았다.







기습공격.


알기 전까지는 '참'이었는데 알아버린 순간 '거짓'이 되는 일을 또 당했다.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것을.  어처구니없는 기습공격이다. 속수무책 당해야 하는 게 억울하다. 억울한 게 당연한 것이 되려면 속인사람의 고의성이 분명해야 하는데 이게 병의 증상이라니 어쩌겠나. 처참하다. 억울함과 분노의 힘으로 병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면 최대치로 발악을 하겠지만. 어쩌랴. 그저 당한 내가 내 마음 하나 잠잠해지기 위해 에너지를 끌어모다. 기습공격 시 대처방법은 오로지 이거 하나다. 자기가 자신을 다독이는 일.



페허.


날마다 <하루하루에 살자>와 갬아넌 교본으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번에 무장해제.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이건 아니지,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고 해도 자신을 다독이는 일은 쉽지 않다. 무너지는 건 순간이어도 복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불 뒤집어쓰고 울음을 쏟아내면 가까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건 오래전 이야기다. 이제 마음보다 몸이 더 깊이 내려앉아버린다. 내가 나더러 실컷 울라고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울음 없이 명치끝이 아파온다. 사라졌던 게 재발했다.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마음밭이 드러나면 명치끝의 통증은 더 심해진다.



불행 중 다행.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궁지에 몰렸을 때 찾아갈 누군가가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아들은 퇴근하고 아버지뻘이 되는 GA협심자를 찾아갔다고 했다. 도박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도박을 했지만 재발사실을 숨기고 GA모임에 나왔다고 말하고 조언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의 조언으로 '곧바로 부모님 집에 찾아와 이실직고'를 하게 것이다. 아들의 재발을 알게 된 다음날 연락처를 물어 그분과 통화를 했다.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참다가 터진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의 참말이어서, 그만.



"정상인처럼 생각하면 안 되십니다. 잘 아시잖아요."

뜨끔했다.



'통제가 안 되는 병이었지. 맞다, 지독한 거짓말이 증상이지, 너를 속였다는 게 그렇게 억울했냐.

아직 멀었네. 너 아직도 '정상적인 삶'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아빠가 더 충격받으신 것 같네요. 형을 암환자라고 생각하세요. 어쩌겠어요."

위로가 되진 않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며칠 뒤 퇴근하고 집에 들른 막내가 형의 재발 소식을 들고 던진 말이다. GA 100일 잔치에 가서 눈물의 포옹까지 했는데 그게 다 연극이었다니 저도 충격이었으리라. 식구들 모두 거짓 드라마의 등장인물이었던 거고. 대본 감독 없이도 주인공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서 진짜라고 믿었던 거고. 그래서 감동하고 감명받았던 거고. 주변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대담해졌던 거고. 맨 마지막 '충격적' 반전이 있었던 거고.




아직.


아직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연락도 없지만 연락이 와도 당분간 얼굴을 보는 게 힘들 것 같다. 아무리 병에 걸린 환자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니까. 아들을 상담해 주신 GA협심자 분은 '누가 뭐래도 본인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맞는 것은 알겠는데 지금 엄청 힘들어할 것 같긴 한데. 난 거짓말에 대해 죄책감이 없는 태도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게 아무리 도박병의 증상이라고 해도.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아무리 환자여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 사과받고 싶은가 보다.'






가엾은 아이.


꿈을 꾸었다. 난간이 없는 폭이 좁은 외길 낭떠러지를 걷는데 양쪽은 파도가 거친 바다였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냥 떨어져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하는 순간 잠에서 깼다. 또 꿈을 꿨다. 곁에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길에서 아들을 만났던 거다. 친구는 한발 뒤로 물러섰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아들은 절뚝거리고 양손과 어깨에 짐을 잔뜩 지고 있었다. 뭐라고 주고받은 이야기를 없었는데 그게 내 생각에는 도배일을 하는 장비들처럼 보였고 서로 갈길을 가고 헤어졌다. 그리고 또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네댓 개의 꿈을 꾼 것 같다. 나보다 남편이 먼저 깨서 나를 깨웠다. 이런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여기면서. 출근하면서도 현관에서 한참을 쳐다보고는 출근했다.




도박중독의 세계와 아닌 세계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는 것 같다. 공유될 수도 없고 알기 힘들게 하는 장벽, 넘나들기 힘들다. 그 세계에 대한 공부와 거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하단 걸 알지만 나는 아들의 고통에 가닿을 수가 없다. 얼마나 더 공부가 무르익고 연민이 깊어져야만 가능할까. 영영 모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럴까봐 겁난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뭘까.


너는 너, 나는 나대로 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고. 곁에 머물러 줄 주는 있어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 각자 자기 삶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건가. 이게 통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법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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