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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사 Sep 18. 2024

이제 두 다리 뻗고 자겠구나!

명절증후군 거짓말과 만병통치약 기도

"세 아이 모두 잘 키웠으니, 이제 두 다리 뻗고 자겠구나. 네 건강에만 신경 써라."



엄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런 말을 한다. 내 속을 모를 수밖에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 큰애 도박문제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건 모르는 게 약이다.


도박이 재발했다고 말하고 연락이 없는 큰애 빼고. 장염 걸려 제 집에서 쉬겠다는 둘째 빼고. 남편하고 막내 하고만 친정집에 다녀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엄마 혼자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주 가지 않는다. 내 코가 석자라는 나 혼자만의 이유로. 혼자 남은 노모보다 병을 앓는 자식이 급하니 괜찮다고 면죄부를 주면서. 우리 엄마 아픈 없고 멘탈이 강해 다행이라고 위안을 하면서.




명절증후군 거짓말.


내가 앓는 명절 증후군은 '거짓말로 둘러대야 하는 곤혹스러움'이다. 장시간 가사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라 감추지 않아도 될 일을 감춰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큰애가 건강하게 직장 잘 다니고 있다고. 바빠서 못 오는 거라고. 물어보지 않을 때는 입만 다물면 되지만 물어볼 때마다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야 하니 난감하다. 큰애와 동갑내기 조카는 결혼애서 아들까지 낳고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질문이 계속 늘어난다. 사귀는 여자는 있느냐. 나이가 몇이 더라 이제 결혼해야 하는데... 엄마는 묻고 나는 둘러대고. 둘러대다 숨이 차면 말을 돌리곤 한다. 그러니까 엄마의 기도가 필요한 거라고. 기도해 달라고. 엄마는 자신의 기도 덕분에 자식들이 무탈하다고 믿고 있다. 철석같이. 나도 엄마의 기도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는다. 엄마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전지전능한 분이시니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내가 큰애한테 속았듯이 친정식구들도 미심쩍어하면서도 속고 있는 중이다. 거짓말은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만 모르면 될 일인데도 동생들에게도 말을 못 하고 있다. 안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안다고 해도 좋을 일이 없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 알면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병이 될 게 뻔하다. 나에 대한 동정까지 얹어서.



비밀秘密.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비밀이라고 한다. 도박이 왜 비밀이어야 하는가 싶지만 내 사전에 없었듯이 친정식구들 사전에도 없는 말이라 충격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충격까지 고려해야 하는 깊은 배려심 어쩌고 저쩌고가 아니라 안다고 한들 괴롭기만 할 테니 나하나로 족하다 싶다. 어쩌면 듣고도 말로는 그 심각성을 모르니 그저 한때 그러다 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큰애가 선을 넘지 않은 것 하나가 외가식구들이었다.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더군다나 동갑내기 사촌이 있어서 알게 모르게 경쟁을 하면서 커왔기 때문이리라.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거짓말에 묻어 아무렇지 않게 외가에 드나들었지만 이제 그렇게 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걸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걸까.


문득 비밀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알기 힘들다는 면에서 도박중독문제는 아직도 내겐 비밀스러운 세계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가깝고도 먼 사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침묵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침묵하면 끝날 일을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다. 최대한 자제하고 축소한 거짓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실대로 말하기 어렵다. 시집식구들에게는 알려도 친정식구들한테는 얘기하기 힘들다. 내가 이제야 살만해진 줄 알고 있는데 친정식구들에게 어떻게 사실을 알리겠는가.


말할 기회도 없었다. 큰애 도박문제로 숨을 헉헉 대고 있을 때 오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고 아버지도 병환에 계셨으니. 아버지 가시고 나서 엄마 혼자 남았고, 그냥저냥 시간이 흘나는 나대로 살아온지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잘 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기도하면 된다. 괜찮다. 비밀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주어지는 대로 제 몫을 삶을 자기 꼴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애들 모두 잘 키웠으니 이제 넌 두 다리 뻗고 살겠구나. 네 몸이나 잘 챙겨라.


'엄마. 저도 두 다리 뻗고 잘 줄 알았고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인생 참 쉽지 않네요. 하루하루 살아가야지 어쩌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기도해 주세요.' 내 속에서 들끓는 말이 엄마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 마음에 맞는 짝을 만나서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어떻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지옥살이 시키겠나이까. 주님.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밥벌이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근근이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게끔 병든 아이를 도와주세요. 더 이상 도박병 증세가 악화되지 않게. 제발.'내 속에서 끓어 넘치는 기도가  하늘에 가 닿으려나.

엄마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어둠 속이라도 다시 걸을 수 있다고 한 노랫말처럼 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아직 내 마음은 복구되지 않고 폐허다. 살아갈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도는 폐허를 복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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