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바람이 차도 밖으로 나가지고 했다. 나는 걷는다고 말하고 남편은 임장이라고 하는 나들이다. 남편은 입지조건을 따지고 전반적인 환경 등등을 살펴 '살고 싶은 동네'를 보는데 나는 의외로 단순하다. 산이 보이면 좋고 성당과 도서관이 가까운 곳이면 된다.
도봉구로 가보자고 했는데, 내가 살던 도봉구네, 그 말에 당신이 살던 공릉동은 노원구라며 어이없어하길래, 바로 검색 들어갔다. 두리뭉실 부정확하고 허당인 내가 남편을 이겨먹는 방법은 단 하나,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
공릉동이 지금 노원구인 건 맞아. 그런데 내가 왜 도봉구라고 한 건지 알려줄게. 들어봐. 남편은 운전을 하고 나는 바쁘게 움직였던 손 대신 입이 바빠졌다.
결혼하기 전에 살던 공릉동은 노원구 맞아. 그런데 그게 원래는 도봉구였다고. 도봉구였을 때부터 살았기 때문에 입에 붙은 주소는 서울시 도봉구...... , 였던 거지. 1963년 서울로 편입되었을 때 성의 북쪽이라고 해서 성북구라고 불렸고 그때는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단 말이지. 1973년 도봉구로 떨어져 나왔으니 학교 다닐 때 내가 기억하는 주소는 서울시 도봉구......, 였던 거야. 그래서 도봉구라고 했던 거라고. 머리로는 노원구인줄 알지만 도봉구라고 말이 나온 거라고!
한번 와보고 싶었었는데.......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희망은 힘이 세다고.
열흘도 남지 않은 2024년. 이때 희망은 힘이 세다고 말해주니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한 희망은 사라질 수 없는 거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등을 토닥이며 건네는 말 같아서 마음이 환해진다. 힘겨운 한 조각에 집착하지 말고 이미 누리고 있어 좋은 조각들에 감사해야겠다, 마음을 밝히며 속삭인다.
외관도 멋있지만 안이 더 오밀조밀 잘 지어졌다
층별 안내
중정
발코니에 나가 산을 좀 더 밀착해서 보고 싶었건만, 바닥이 미끄럽다고 막아놓았다.
앞이 도봉산이면 뒤가 수락산, 앞이 수락산이면 뒤가 도봉산이라 산에 둘러싸여 포근하게 안겨있는 느낌, 볼 줄 몰라도 여기 명당인 것 같다.
도서관 안에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었는데, 뜻밖에 아이들 소리가 들려 힐끗 들여다보니 [민주주의 놀이터]라는 공간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난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이곳의 분위기를 햇살처럼 환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소리다.
아, 도봉산
아, 뒤를 돌면 수락산
창밖 동네풍경
아쉽게도 옥상서재는 잠겨있다
전망이 좋아 뷰를 타령하고 있지만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독립되었지만 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기억곳]이었다. 박종철기념사업회관련해서 남영동대공분실 견학 갔을 때 김근태가 고문받은 곳, 칠성판이 놓인 자리를 가리키며 설명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라는 부인 인재근의 1985년 9월 27일의 글은 생생하다. "당신의 색시 재근이가"라는 다른 손 편지를 다 읽고 나니 울컥한다.
"이 몹쓸 세상, 어찌하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먼저 가고 독한 것들과 잡것들은 오래 남는가." 참사람 김근태를 추모한다고 쓴 황지우 시인의 <2012년을 점령하라!>는 또 어떤가.
격동의 80년대에 20대를 보낸 나에게 각별한 시간이었다.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수락산 보이는 양지바른 테라스 쪽만 열려있네
기념관 건너편은 도봉산 성당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당신 좋아하는 성당, 가봐야지."
도봉산 성당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당 유리벽면에 비친 도봉산
아, 여기도 도봉산
방금 전 들렀던 김근태기념도서관도 보이고 그 뒤로 도봉산도 보인다. 계속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고 졸졸 따라붙어서 자꾸 관악산을 버리고 도봉산이 있는 이 동네로 오고 싶어 지게 만든다. 도봉산-수락산-불암산을 품고 있어 어린 시절 고향 같은 곳, 결혼해서 관악산주변 동네에서 열 번 이상 이사를 다니면서 살아 미련이 없다. 미련이 없는 마음과 실행에 옭기는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임장을 핑계로 놀러 다니는 건지, 노년을 보낼 집을 정말 찾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일단 살고 싶어 지는 동네 하나는 건졌다.
나는 그런데, 남편도 도봉산에 반한 눈치다. 잘 됐다!
미사 끝나고 성전에 불이 꺼지고
곧, 아기예수 오신다
일 년에 한 번 성탄절에 성당 가는 이유가 그날이 주님 그 양반 생일이라 기분이 좋은 그 양반이 기도를 잘 들어줘서라고, 읽다 말고 박장대소했던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성탄절에는 누구나 '믿는 자'가 되어 기쁘고 행복하 해진다, 적어도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려고 하는 걸 보면 대단한 위력을 지닌 날이다. 모든 것에 너그러워지고 마음을 낼 수 있는 단 하루. 성당에 발걸음 할 수 있다는 것도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생일 맞은 양반이 성당 발걸음하는 횟수를 따져 박절할리가 있겠는가. 사랑이 많으신 양반인데.
불쌍한 저희를 돌보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어두운 성전 안에서 장궤 하고 기도를 올렸다. 어디에 살든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평화로이 이끌어주십사 하고. 생일이 임박하신 양반이니 꼭 들어주시리라 믿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