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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r 01. 2020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시사 보도를 보는 것 같았던 <인비저블 맨>


<인비저블맨>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블룸하우스표 호러 영화를 기대하고 갔을 테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또 영화관을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지금 이 "시국"에도 불구하고 인비저블맨을 관람하러 갔을 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불이 켜진 후 관객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고 자신한다. 이거 뭐야, 또는 이거 뭐지? 또는 이거 도대체 뭐야? 라는 식의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호러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정말이다, 서스페리아도 미드소마도 유전도 곡성도 다 호러 영화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또 전세계적으로 무서운 영화를 만드는 건 전세계적으로 웃긴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귀신 영화는 어째 봐도 무섭지 않은데, 그건 내가 그 "귀신"의 공감대를 형성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서로 나누는 괴담들을 충분히 나눌 시간이 없어서 한국의 여러 귀신 영화들, <장화 홍련(물론 이건 무서우라고 만든 영화가 아닌 건 안다)>, <여고괴담(이것도)>, <알포인트(이건 군대를 갔다 와야 무서운 영화라고 하는데, 만약 정말 그렇다면 "좋아, 난 대중영화지만 애초부터 실패 전략을 취하겠어!"라고 하는 셈)>은 어째 무섭지 않았다. <기담>도, <경성학교>도, <가위>와 <폰>도 다 그냥 그랬다. 심지어 <폰>은 우리 가족 사이에서 큰 불화를 일으켰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던 나 때문에 모두 다 영화관에 앉게 되었는데, "대체 저기의 어디에서 무서움을 느껴야 한단 말이냐"라고 아빠가 격분한 것을 시작으로 서로 영화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다투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서움의 기제를 자극하려면 그 무서움의 기제가 무엇으로 만들어져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되기 때문에 만국 공통의 공포 언어를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최근 잘 팔리는 책들, "옐로북"들을 보면 적어도 지금 이 세대들은 두려움에 대한 공통 분모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를 찾아줘>를 시작으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과 가학적인 남성들을 주로 주제로 다루는 하우스 스릴러 소설이 불티나게 출간되고 있다(어메이징 에이미가 이 스테레오타입에 해당하진 않지만). 요즘 내가 읽은 것들만 해도 거의 그렇다 - 자매에 대해 공통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에 대한 소설 <시스터>, 문만 닫으면 다른 남자가 되어 자신을 조종하는 남자가 나오는  <비하인드 더 도어>, 자신의 신체와 식단을 모두 통제하려는 남자를 둘러싼 치정극 <마지막 패리시 부인> 등등 너무 많아서 셀 수 없는데, 하긴 비단 이 시대에만 출간된 것은 아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도 애거서 크리스티도 현관문을 닫는 순간 모두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린다는 단절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문 안의 여성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다만 이제는 아동에 대한 학대가 범죄로 간주되듯이, 집 안의 "내" 아내와 "내" 여자친구에 대한 학대가 범죄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루밍이니 가스라이팅이니 하는 용어가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인비저블맨>을 보면서, 영화의 완성도는 차치하고, 내가 공포를 느낀 것은 확실하다. 남자친구가 죽은 후에도 여자는 끊임없이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내가 또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자기 스스로를 의심한다. 분명 그 사람은 죽었고 내가 환각을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다들 내가 미쳤다고 말할지언정 남자친구는 이번에도 자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확신이 번갈아 왔다갔다한다. 적어도 내가 느낀 <인비저블맨>의 공포는, 보이지 않는 남자가 여자를 공격하는 미스터리한 상황보다는 여자가 초췌하고 피폐한 얼굴로 자신을 계속 의심하는 상황에 있었다.


얼마 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도 그루밍 범죄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었다. 얼핏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여자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남자를 이용하려 일부러 범죄를 연출한 "나쁜 사람"이었으며, 우선 남자가 자신을 때린다고 고소한 후에 다시 그 고소를 취하하며 남자에게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개 남자의 여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이 행해지기 이전에는 정신적인 구속이 선행하기 마련이다. 여자가 자신에게 반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정신적으로 여자는 자신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확신이 만들어질 정도로 장기간의 관계가 지속된 후에 신체적 폭행이 가해진다. 남자가 더 간교하고 교묘할수록 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를 의심한다. 심지어 여자도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남들 눈에는 다 좋은 사람이라는데 나한테만 그런 사람일 리 없어,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잘못 한 거야.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악순환인 것이다.


<인비저블 맨>을 보면서 사회에 분노하고 내 예전의 관계에 분노하고,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지만 - 사실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 "인비저블 맨"의 실체가 드러난 순간 급격하게 동력을 상실하는데, 이건 반드시 인비저블 맨이 "비저블 맨"으로 변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니 <그것이 알고 싶다>라든지 내가 읽은 소설들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진짜 무서운 건 언제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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