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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Jun 11. 2017

나쁜 사람은 없는 세상, 바닷마을 다이어리

잔멸치의 척추처럼 투명한 마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봤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고, 그 영화를 기점으로 감독의 전작과 후작을 챙겨보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은 아니지만, 가장 꾸준히 지켜보고 있는 일본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누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한국 감성스러운 일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누구는 “걸작과 평작을 번갈아 내어놓는 신기한 감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지겨운 부분도 꽤 있었고, 너무 뻔하다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나에게 <환상의 빛>,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만든 감독이다. 



세 편 다 언제 어느 때나 어느 부분에서든 보아도 좋은, 편안한 음악 같은 영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특히 그렇다. 청량하고 개운한 느낌이라 영화채널에서 방영해 주면 저절로 리모컨을 멈추게 된다. 이게 진짜라고, 라고 탄식하게 만들었던 <아무도 모른다>와는 달리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 혹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과 부러움이 든다. 네 명의 주인공과 그 배경 모두 산뜻하기 그지없다.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던 세 자매가 장례식장에서 배다른 여동생을 만나 같이 살게 된다. 바다가 지척에 있는 낡고 큰 집에서 매실을 따고, 카레를 만들고,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며 살아간다. 욕조에 벌레가 들어왔다고 난리를 피우고,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축구 동아리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그러다 다시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고. 하잘것없는 일들이 반복하는 그녀들이 너무나 부럽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무심결에 정말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는지도 모른다. <빨간 머리 앤>의 앤 셜리가 강조하듯 인생의 큰 행복보다 소중한 것은 제비꽃과 조약돌 같은 작은 반짝거림이 아닌가. 너무 빠르게, 너무 힘들게, 너무 심각하게 살아가는 덕에 그 사소한 반짝거림은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네 자매 모두 어느 정도의 결핍, 또는 모자란 부분이 있다. 집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챙겨야 했던 첫째딸(아야세 하루카)은 할머니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사실은 그런 자신을 돌봐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필요해서 아내가 있는 남자를 만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배다른 언니들의 집에 얹혀 살게 된 막내(히로세 스즈)는 자기가 있음으로 하여 언니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늘 전전긍긍하다. 하지만 그렇게 뭔가가 부족한 삶이기 때문에 작은 반짝거림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리라. 파도가 밀려왔다 달려나가듯 삶에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큰 부침에는 무감각한 반면 언제나 곁에 있는 것들 - 내 가족, 내 동생과 내 언니, 동네 어귀의 식당, 어묵 카레와 매실나무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삶의 감각은 그녀들이 가진 최고의 자산이다.


그녀들에게 나쁜 사람은 없다. 그녀들의 눈을 대신하는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하다. 막내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듯한 새엄마나, 첫째에게 막중한 책임을 떠넘겨버린 엄마도 그저 약할 뿐, 그래서 나름의 사정이 있을 뿐이지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바닷마을에 사는 자매들은 투명한 마음으로 투명한 세상을 보고 투명하게 매일을 살아나간다. 깊게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노력하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를 포기해 버리지도 않는다. 척추가 비칠 정도로 얇고 날씬한 잔멸치를 닮아, 바다를 헤엄쳐 나간다. 건강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자전거를 타고 싶고, 토스트가 먹고 싶고, 전갱이 튀김과 맥주가 나오는 식당에 가서 누군가와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다. 인생의 사소한 즐거움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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