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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Feb 24. 2017

바르셀로나의 하몽하몽

여행자를 위한 음식


바르셀로나 시장의 하몽

여행자를 위한 음식




비가 유독 많이 오는 날에 바르셀로나 시장에 갔다. 부디 겨울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심지어 모로코 지역ㅡ 즉 북유럽이나 남부 유럽이라고 불리는 곳에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스키복이라고, 처음 스페인에 갔던 때에는 저 스키복을 주구장창 입고 다녔더라고, 스페인이든 포르투갈이든 그리스 에게 해 섬들이든, 사바나 초원이 아닌 한 추운 겨울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혹한의 추위는 아니지만, 대부분 뭔가 적당히 쌀쌀한 가을을 생각하고 가기 때문에 의외로 추운 날씨에 된통 뒤통수를 두들겨맞기 일쑤다. 소매를 지퍼로 뗄 수 있는 옷이라 소매 없이 입으려고 가져갔는데 저 옷이 없었으면, 아찔하군요. 저땐 스페인에 처음 간 김에 눈에 띄는 자라ZARA 매장은 모조리 들어갔다 왔는데 (나는 늘 갈 때는 거의 맨몸처럼 가는 반면 돌아올 때 트렁크가 터져나가는 편이다) , 겨울옷 없이 갔더라면  통장이 텅장 되는 일은 지구 어디서든 벌어진다는 걸 새삼 확인하고 왔을 테다.


물론 시장 안도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실내의 탈을 쓴 야외 느낌이었다. 그래도 날이 춥다고 식욕이 떨어지는 건 전혀 아니니까, 사람은 많았다. 전형적인 유럽 시내 시장을 생각하면 되는 곳이다. 과일, 생선, 가공육류와 간단한 먹거리를 판다. 다만 과일의 색깔이 하나같이 너무나 예쁘고 선반마다 널려 있는 케이크들이 앙증맞은데다가 온갖 종류의 치즈가 눈을 사로잡는다는 게 바르셀로나 시장의 팜므/옴므파탈적인 포인트다. 치즈, 올리브, 과일과 돼지고기는 저절로 와인을 찾게 만든다.


이베리코 하몽이라고, 도토리 돼지고기(한국의 참외 돼지고기처럼 뭔가 특별한 것을 먹인 돼지고기로 포지셔닝했다, 라고 말하면 너무 실례이려나)라 쉽게 이해하면 좋은 재료가 있다. 너무 과대포장 및 과대평가가 된 감이 있어서 굳이 참외 돼지고기에 비유하고 싶은 것이다ㅡ 정말로 맛있다. 값도 다른 하몽보다 훨씬 비싸다. 그렇지만 "감히"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신의 물방울에 견줄 만한 묘사가 방언 터지듯 나오는 것도 아니다. 바르셀로나 시장은 맛있는 하몽이란 신선한 올리브나 숙성 잘 된 치즈처럼, 어느 브랜드 또는 유명세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그를 고르고 먹는 때와 장소와 사람에 달려 있는 식재료임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옆구리 한쪽에 빵, 치즈, 과일을 낀 채 하몽을 썰어달라고 한다. 시장 한 곳에서 한입거리 타파스를 먹는 사람도 많지만 그날 저녁거리를 준비하며 돼지고기를 사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와인 병까지 끼고 있는 걸 보면 괜히 내가 신이 난다. 추운 날씨에 집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와인을 마시면, 짭짤한 치즈와 하몽을 먹으면,  그날 밤만큼은 꼬박 날이 새도록 즐겁고 따뜻하고 외롭지 않은 밤이 되지 않을까. 여행자가 감동을 느끼는 때는 그런 순간인 것 같다. 혼자서 돌아다니며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는 호쾌함을 만끽하다가도 날이 차가우면, 밤이 어두워지면 문득 두렵다.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언제는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외로워 저녁 입맛이 서서히 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꼭, 비가 오고 바람이 불더라도 시장에 가야 한다.


바르셀로나 시장에서 축축한 우산을 들고 다니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우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방울을 튀기지 않도록 몸을 잔뜩 움츠리고, 귀가 나오지 않도록 모자를 덮어쓰고. 그러다가 하몽을 써는 아저씨와 와인병을 옆에 낀 아저씨, 빵을 고르는 아줌마, 과일을 아무렇잖게 늘어놓는 아줌마 덕분에 식욕이 빠르고 확실하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론다 마을로 향할 때에는 날씨가 좋아, 스웨터 한장만 입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미 그때쯤엔 시장에서 샀던 하몽은 다 먹어치웠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제일 아름답게 나오는 영화 중 여느 막장드라마 뺨치는 하몽하몽 영화를 자주 본다. 결코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은 아니고 (나의 인내심이 그리 뛰어나진 못하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예쁜 부분만 골라 본다. 싱그러운 에너지를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의 에너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색색깔의 과일을, 신선한 올리브를, 잘 저며놓은 돼지고기를, 그리스식 페타치즈를, 바르셀로나를 자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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