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불한당(Punk)들

CBGB와 뉴욕 펑크, 그리고 영국병과 런던 펑크

by 강파이프 PIPE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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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의 로컬 스쿨밴드 '이구아나스(The Iguanas)'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제임스 오스터버그는 담배를 태우지도, 마약에 손을 대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던 착실한 청년이었다. 블루스에 관심을 가지며 18살이 되던 해 '프라임 무버스(The Prime Movers)'에 가입하기도 했던 그는 1967년, 미시간 대학에서 열린 '도어즈(The Doors)'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어둡고 낮은 공연장에서 가죽 바지를 입고 LSD에 취한 채 관중들에게 'F**k You'라는 욕설을 남발하는 짐 모리슨의 모습을 보며 제임스는 큰 감명을 받았고, "히트 앨범을 내면서도 이렇게 난리를 피울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무대에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며 '사이키델릭 스투지스(The Psychedelic Stooges)'를 결성하고 디트로이트의 할로윈 파티에서 데뷔 무대를 치룬다. 그리고 1년 뒤, 사이키델릭 스투지스는 '스투지스(The Stooges)'로 이름을 바꾸고 엘렉트라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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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gy Pop, Live at The Whiskey a Go-Go, West Hollywood, 1973. (C) James Fo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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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의 짐 모리슨을 보며 드러머가 아닌 프런트맨이 되겠다고 다짐한 이 청년, 제임스 오스터버그가 바로 훗날 펑크 록의 대부로 불리게 되는 '이기 팝(Iggy Pop)'이다. 오르는 무대마다 잔뜩 술을 마신 채로 원시적이고 소음에 가까운 라이브를 보여 준 이기 팝은, 준비되지 않은 관중들 위로 스테이지 다이빙을 시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땅콩 버터를 몸에 바르고 깨진 유리 조각들로 몸을 그어서 피가 나게 하는 등 기행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기세에 탄력을 받은 스투지스는 이기 팝을 앞세워 존 케일이 프로듀싱한 데뷔 앨범 'The Stooges'(1969)에 이어 거친 라이브의 느낌을 담은 2집 'Fun House'(1970)를 발표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기 팝이 보여 주었던 음악과 정신 세계는 70년대 초의 미국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급진적이었고, 멤버들은 하루가 다르게 헤로인과 알코올에 중독되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도, 앨범이 팔리지 않았다.


급기야 밴드는 1971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기 팝의 친구 제임스 윌리엄슨이 기타를 맡고 기존의 론 애쉬튼을 베이스로 밀어내며 'Iggy & The Stooges'라는 이름으로 3집 'Raw Power'(1973)를 발표하기는 하지만 이마저도 상업적으로 실패하며 이듬해인 1974년, 스투지스는 완전히 해체한다. 그러나 69년부터 73년까지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활동 기간동안 이기 팝과 스투지스가 펼쳐 낸 대중음악의 역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아방가르드한 음악적 시도와 68혁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MC5의 거친 사운드에 영혼을 불어넣은 이들이 바로 이기 팝과 스투지스였으며, 이들은 이후 '프로토 펑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70년대 중반 뉴욕에서 시작된 '펑크 록'의 전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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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mones, Live at Old Waldorf, San Francisco, 1978. (C) Howard Bar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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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지스로부터 펑크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 뉴욕에서는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세 장의 앨범을 연달아 내놓으며 다양한 음악적 진보를 꾀하고 있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영향으로 미국의 록 밴드들이 전멸해 가던 상황에서 그들의 활동은 꽤나 고무적인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밴드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없다시피 했고, 레코드 판매량은 바닥을 쳤다. 그러나 '뉴욕'만의 고유한 록 밴드가 없었던 60년대 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등장이 인디 씬의 록 밴드들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전위 예술의 분위기는 이기 팝이라는 독자적인 캐릭터의 등장으로 격렬해지기 시작했으며, CBGB 클럽을 본거지로 하여 뉴욕의 록 씬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71년, 뉴욕 돌스(New York Dolls)를 시작으로 패티 스미스(Patti Smith)와 텔레비전(Television), 토킹 헤즈(Talking Heads), 블론디(Blondie) 등의 걸출한 밴드들이 등장하며 '펑크'와 '뉴웨이브'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적 기류는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무엇보다 뉴욕 출신의 밴드들이 이 흐름의 주역이었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70년대 중반 등장했던 뉴욕 펑크 밴드 중에서 특히나 두각을 나타냈던 이들은 단언컨대 '라몬즈(The Ramones)'다. 사실상 최초의 펑크 밴드라고 할 수 있는 라몬즈는 '펑크'라는 장르를 정립시키고 후대에 등장하는 펑크 음악들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했는데, 이들은 단순히 사운드의 결을 넘어 3코드 진행이나 간결한 멜로디, 직설적인 가사 등 'DIY(Do-It-Yourself)' 정신을 충분히 재현해 내면서도 뛰어난 리프 메이킹과 시원시원한 연주력으로 펑크라는 장르의 비전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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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i Smith, Live at The Boarding House, San Francisco, 1976. (C) Barry Sche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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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 동부의 70년대 중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펑크의 열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다음 세대의 음악인 헤비메탈이 등장하며 뉴욕 펑크의 인기는 싸늘하게 식어 갔고, 80년대에 접어들 즈음 사람들은 더 이상 펑크 밴드를 찾지 않았다. 패티 스미스, 라몬즈, 블론디 등의 밴드들은 80년대 이후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 갔지만 초창기에 보여 주었던 거친 펑크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장르로 노선을 변경했고, 캘리포니아에서 초대형 메탈 밴드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며 라디오와 대중매체는 LA로 스포트라이트를 돌린다.


펑크라는 장르가 미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흡수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펑크'라는 장르가 서브컬쳐를 표방하며 주류의 대중매체를 거부하는 문화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들은 펑크(Funk)와 디스코를 거부했으며 라디오에서 재생되는 음악보다는 CBGB의 공연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그들은 비단 주류 문화뿐만 아니라 하위 문화의 폐단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특히 환각제에 취해 말로만 평화를 외치는 히피들을 사회의 병폐라 지적하며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는 이러한 급진적인 서브컬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마초이즘과 기독교 신앙, 그리고 닉슨 쇼크와 오일 쇼크라는 경제적 위기를 어느 정도 감당해 낼 수 있었던 중산층 중심의 사회 구조는 펑크라는 문화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뉴욕 펑크 밴드들의 전위성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영향 아래에서 등장한 다양한 펑크 밴드들은 실험적인 사운드와 노골적인 가사, 익숙하지 않은 연주법을 적극 차용하며 자신들의 역량을 이끌어 냈지만 문제는 그러한 음악이 대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렸다는 것이다. 이미 음악적 대체재가 많았던 미국의 대중들은 이들의 음악을 '신선하다'고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호소를 느끼지는 못했다. CBGB 출신 밴드들의 에너지와 공격성은 특정한 방향으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향으로 끝없이 발산되었고, '뉴욕 펑크'는 하나의 장르로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서지 못하며 헤비메탈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결국 초기의 펑크 록으로 유명세를 탔던 많은 밴드들은 80년대에 접어들며 해체되거나, 펑크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로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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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Save the Queen>. Sex Pistols.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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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뉴욕 펑크의 후퇴가 곧 펑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뉴욕 펑크가 짧은 전성기를 맞고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한 1977년, 런던에서는 보다 과격하고 공격적인 펑크 밴드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돌풍의 시작은 1975년, 런던 킹스 로드에 있는 한 옷가게에서 결성된 밴드로부터 비롯된다. '스트랜드(The Strand)'라는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 스티브 존스와 폴 쿡은 기타리스트 윌리 나이팅게일을 내보내고 옷가게에 붙인 오디션 공고를 통해 보컬에 존 라이든을 영입하며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는데, 이들이 바로 록 음악의 역사를 뒤흔든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다. 빌 그런디 쇼를 포함, 공식 석상에서도 비속어 사용과 욕설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은 글렌 메들록의 탈퇴 이후 시드 비셔스가 합류하며 말 그대로 양아치(Punk) 밴드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데뷔 싱글 'Anarchy in the U.K.'(1976)가 수록되어 있는 첫 스튜디오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1977)를 발매하며 런던 펑크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섹스 피스톨즈는, 아나키즘을 주장하고 여왕을 조롱거리로 만들며 70년대의 영국 사회를 엄청난 폭풍 속으로 몰아넣는다.


뒤이어 등장한 '클래시(The Clash)'는 섹스 피스톨즈의 열기를 이어 가며 런던 펑크의 부흥을 이끌었다. 클래시는 데뷔 앨범 'The Clash'(1977)를 시작으로 'London Calling'(1979), 'Combat Rock'(1982)과 같은 명반을 남기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음악적 메시지로 풀어내는 등 섹스 피스톨즈가 실현하지 못했던 펑크 록의 음악적 발전을 이루어 낸다. 오직 직선적인 음악만을 추구하며 폭력으로 일관했던 섹스 피스톨즈와는 대조적으로 클래시는 내실 있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내비치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꾀한다. 이 외에도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에 게스트 밴드로 나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댐드(The Damned)는 고스(Goth)풍의 이미지로 또 다른 서브컬쳐를 발전시켰으며 버즈콕스(Buzzcocks)는 펑크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면서도 특유의 서정성으로 런던 펑크의 지평을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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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Calling>. The Clash.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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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출신 펑크 밴드들의 음악은 뉴욕 펑크의 음악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가령 뉴욕 펑크가 '자기 표현'과 '예술성', 혹은 '순수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었다면 런던 펑크는 '사회운동'과 '폭력', '이념' 등에 치우쳐 있었고, 이 때문에 런던의 펑크가 상대적으로 집중성 있고 통일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를 비롯한 당대의 밴드들은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법보다는 무정부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이념들을 스스럼없이 내비치고는 했다. 70년대 말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함의하며 등장한 펑크는 단순한 음악적 장르가 아닌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으며, 이들의 기원과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0년대의 영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노동당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 범지구적 경제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비효율적인 산업 구조를 유지하며 점차 경기 침체에 빠져 가고 있었다. 노동 생산성 자체도 타 국가에 비해 눈에 띄게 낮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정부의 기업 국유화 실패와 노조의 요구에 따른 임금 인상이 지속되며 재정 적자가 커지는 경제 정책이었다. 과도한 복지 및 고임금의 경제 구조와 지속적인 파업, 비효율적인 생산성이 맞물리며 영국은 말 그대로 '병'을 앓고 있었고,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로는 경제성장률이 -2.47%를 기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장기적인 경제 침체와 당시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 전반을 들어 '영국병(British Diseas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영국은 결국 1976년 경기 악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등장한 음악이 바로 1977년의 브리티시 펑크, 즉 런던 펑크다. 병약한 사회의 젊은이들이 직접적인 정치 활동 대신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고, 해결되지 않는 뿌리 깊은 구조적 모순에 좌절하며 표출해 내던 과격한 정치적 관념들이 '펑크'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각 밴드가 견지했던 정치적 입장은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에는 '정치적'인 색깔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뉴욕 펑크와는 대조적으로 런던 펑크 밴드들에게는 공동의 적과 타파해야 할 대상(영국을 갉아먹는 일체의 비효율적 정치, 경제구조)이 있었으며 그에 대한 분노를 투영시킬 대상(정부와 국왕)이 존재했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사회적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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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mned, Live at CBGB, New York, 1977. (C) Ebet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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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펑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는 했지만, 영국의 펑크도 결국 80년대에 들어서며 시들해지고 만다. 1979년, 보수당이 승리하며 집권한 마거릿 대처가 일명 '대처리즘'을 펼치며 영국의 경제구조를 개혁해 나갔고 실제로 대처의 정책들이 효과를 보기 시작하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던 것이다. 밴드들도 유명세를 타면서 점차 출발점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몇몇 밴드들은 독자적인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하지 못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펑크라는 장르가 급진적인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이념이기에 앞서 엄연한 음악적 흐름이기 때문에 결국 내부로부터의 예술적 발전이 없다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한 이치였다. 런던의 펑크는 새롭게 펼쳐지는 영국 사회를 맞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편을 택했고, 개중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를 찾은 밴드들은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쟁글 팝 등 다양한 장르로 뻗어 나간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펑크는 '실패'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라 80~90년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록 음악들의 양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펑크는 80년대의 포스트 펑크로, 90년대의 그런지와 네오 펑크로, 나아가 2000년대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대중음악의 역사 속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로 남게 된다. 힙합이 대중음악을 주름잡고 있는 2022년 현재, 헤비메탈과 얼터너티브가 때때로 한물간 음악으로 인식되고는 하지만 펑크의 '굴하지 않는' 태도만큼은 뮤지션들의 의식 속에 언제나 생생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 펑크가 메인스트림의 주목을 받게 되면, 음악사에 어떤 혁명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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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Image : (C) Richard 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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