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자극적인 서두에 들어오자마자 황당하셨을 마케터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하며 글을 연다. 나는 사실 이런 고민 속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떨쳐낸 건 아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왜 그렇게 기술을 배우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특히 나만의 엣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절실하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선 단순히 내 신세를 한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감각적인 마케터" 그 자체가 귀중한 인재인지 말하고 싶다.
마케터는 누군가에겐 불쾌한 경험을 줄 수도 있고, 현명한 소비를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대학시절 "마케터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라는 책을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책에 담겨있는 내용은 사실 아래의 한 문장으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출처: All Marketers Are Liars by Seth Godin
"마케터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소비자가 그걸 원해서이다"
이게 이 책에서 세스 고딘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웹 3 시장에서의 마케터는 흔히 나팔수라고 불릴 수도 있고 거짓말쟁이라고 불릴 수 있으며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마케팅(세스 고딘이 말하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잘하는 마케팅)을 통해 프로젝트의 제품 및 투자 단계를 상회하는 브랜딩과 퍼포먼스를 이끌 수 있다. 반면에 제품과 토큰을 홍보하는 그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직무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이 현타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 안에서의 마케팅 팀 또한 기업을 먹여 살리는 핵심적인 팀이 될 수도 있고, 기업의 금고만 갉아먹는 무능한 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본격적인 커리어를 마케터로 시작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전통시장에 비해 약 5배 빠른 시간이 흐른다고 치면)
일을 하며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퇴사를 하기도 했다. 반대로 아무도 찾지 못한 최초의 데이터를 내 것으로 만들고 자랑하는 성취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던 찰나에 개발자들이 멋있어 보였다. 한가지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모습이 전문성 있어 보였다.
오래가지 않아서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마케터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여기엔 한 드라마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게 단순한 정신승리가 될지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해 줄지는 아직 나도 모른다. 단순한 드라마 쉴링이 될 수도 있는 글이다.
나는 미국 드라마 실리콘밸리의 광팬이다. 다섯 번 정주행을 했고 드라마에 나오는 재미있는 특정 클립을 아직도 종종 찾아서 보곤 한다.
출처: 드라마 실리콘 밸리 시즌 1 표지
드라마 얘기를 잠시 하자면, 주인공 리처드 헨드릭스는 작중 구글의 모티브인 훌리의 개발자다.
리처드는 다양한 개발자들과 합숙하며 살고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조그맣게 Exit을 하고 인큐베이팅 하우스를 차린 얼릭의 집에서 제대로 된 앱을 개발하지 못한다고 구박받는다.
하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개발한 인기 없는 음원 검색 소프트웨어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엄청난 잠재력이 발견된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진 "미들웨어 압축 알고리즘"은 사실 여태껏 세상에 없던 기술이었고 이내 실리콘밸리에 소문이 퍼진다.
리처드는 그가 일했던 훌리(작중 구글)의 대표인 게빈 밸슨에게 직접 피리 부는 사나이를 1,000만 달러에 매각하라는 제안, 그리고 실제 피터 틸을 모티브로 한 피터 그레고리의 엑셀러레이팅과 더불어 대부분의 지분을 준다는 제안, 이 두 가지 매력적인 조건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출처: 드라마 실리콘 밸리, 피리 부는 사나이의 첫 티셔츠
결국 리처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지키기 위해 후자를 택했다. 물론 초기팀은 유능한 개발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그다지 사업에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촌스러운 팀 셔츠를 맞추기도 하고 엉뚱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통해 허탕을 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인지하던 찰나에 그들에게 귀인이 나타난다.
출처: 드라마 실리콘 밸리 Jared Dunn
훌리 대표 게빈 밸슨의 전담 비서였던 재러드는 리처드에게 합류 의사를 비친다. 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낭만을 좇는 모습에 감동하여 적극적으로 합류 의사를 어필하게 된 것이다. 결국 수많은 뇌물 공세와 구애 끝에, 재러드는 피리 부는 사나이의 COO로 합류하게 된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엄마의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에 부딪히며 사업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리처드 본인이 만든 회사의 CEO 직에서 잠시 쫓겨나기도 하는데 최근 Open AI 샘 알트먼의 상황과 비슷하다. 경영 자질에 대한 의심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결국 며칠 뒤에 바로 복귀하게 된다.
한편 피리 부는 사나이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지 못한 훌리(작중 구글)는 리처드의 알고리즘을 흉내 냈지만 성능은 뛰어나지 못한 소프트웨어를 발표한다. 하지만 재빠르고 노련하게 마케팅 예산을 태워 대중들의 눈에는 훌리의 제품이 먼저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더욱 많은 유저들을 모객하고 미들웨어 기술을 대중화시켜 만족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훌리였다.
물론 드라마에선 멍청한 악당처럼 훌리를 표현하긴 했지만, 만약 현실이었다면 어땠을까? 또 우린 어쩌면 더 좋은 기술을 접할 기회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출처: 드라마 실리콘 밸리 훌리의 위기
한때 "사업 파트는 회사에 개인의 노력이 쌓이고, 개발자는 개발자 본인에게 역량이 쌓인다"는 말에 괜히 일을 하면서 손해 보는 것 같고 직무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티가 안 나고, 몰입을 할 기회가 개발자에 비해 적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를 더 널리 알리는 마케터 또한 노력한다면 그에 걸맞은 근사한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마케팅을 통해 내가 다니는 회사가 더 유명해지고 가치 있어진다면 나는 유명해진 회사를 있게 만든 유능한 마케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현재 나는 정확히 전통에서 분류하는 마케터의 직무는 아니다. 컨설턴트이자 콘텐츠 프로듀서이고 동시에 프로젝트 매니저이다. 이러한 직무명이 큰 범주 안에선 비슷한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적게 됐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자산, 금융을 다루는 시장에서는 결국 마케터가 시장의 최전선에서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쫓을 수 있고 시장을 빠르게 보는 법을 알게 된다. 그게 감각적인 마케터이고 지금 내가 이 시장에서 하고 싶은 포지셔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