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는 저마다의 강점이 있다
"소가 새끼를 낳을지도 모르니까 학교 갔다 오면 한 번씩 확인해 줘."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의 당부를 떠올리며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외양간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순이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출산을 위해 외양간 밖으로 울타리를 치고 만삭의 소만 따로 분리해 놓았는데, 짚 더미 위에 앉아 쉬고 있는 걸 보니 오늘도 송아지를 보긴 글렀구나. 멀리서 확인했으니 그만 돌아갈까? 고민하다가도 홀로 고생하는 우순이를 격려하기 위해 울타리 앞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순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무언가가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기는 대형견만 했는데 도플갱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우순이랑 똑같이 생긴 송아지였다. 꼭 누가 찰흙으로 미니어처를 만들어 우순이 옆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털색도 덜 마른 찰흙처럼 우순이보다 더욱 진한 갈색이었기 때문이다.
[우순이가 벌써 새끼를 낳았어요!]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내고 나니 그제야 식구가 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곧바로 회사에 있는 아빠께 전화가 왔다. 날이 추워서 새끼를 낳으면 수건으로 닦아줘야 할 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니 우순이가 이미 송아지를 정성껏 핥아놔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빠 말을 듣고 보니 송아지의 털은 보송보송 말라 윤기가 나고 있었다. 주변에 양수막이나 태반 등 출산의 흔적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사람이 해줄 일은 없으니 추운 데 오래 있지 말고 집에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울타리 앞에 쭈그려 앉은 나는 홀로 출산의 고통을 겪었을 우순이를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순이는 우리가 첫 시골집에 살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님이 사 온 소였다. 책이나 TV에서만 보던 소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나는 엄청나게 큰 덩치에 놀랐지만, 알고 보니 우순이는 태어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라고 했다. 어린 소 눈에도 나는 어려 보였는지 우순이는 종종 나를 얕잡아보며 호랑이 소리를 내거나, 콧김을 뿜어내며 주먹만 한 눈을 흘기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 첫 소 동생’이 너무나 소중했던 나는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매번 풀 냄새가 나는 싱싱한 잡초를 한 바구니씩 베어다 주곤 했다.
그런 우순이가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해지더니, 이제는 자기와 똑 닮은 송아지를 낳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늘 내가 보호해 주고 먹이를 챙겨줘야 하는 동물로만 생각했는데, 누구도 알려주지 않을 것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 걸 보니 본능이란 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나보다 나은 것 같다. 난 아직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보다 하지 못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데."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우순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끼 옆에만 착 달라붙어 있을 줄 알았던 우순이가 커다란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향해 걸어왔다. 우순이의 커다란 얼굴을 쓰다듬자 거칠거칠한 털이 부드럽게 정돈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무릎을 접고 앉아 있던 송아지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나무젓가락처럼 가늘고 얇은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저러다 곧 부러질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송아지는 곧 쓰러질 것 같은 피사의 사탑처럼 비스듬하게 서 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굳건해 보였다.
어미 소가 저만 놔두고 가버릴까 무서웠는지 갓 태어난 송아지가 절룩절룩 서툰 걸음마를 이어갔다. 그러다 쿵 무릎을 꿇고 숨을 고르던 송아지는 음매~ 하고 우는 우순이의 소리를 듣고 또 한 번 벌떡 일어나 어미의 꽁무니를 쫓았다. 인간이라면 적어도 9개월에서 1년이 걸리는 걸 단 하루 만에 해낸 것이다. 초식동물의 갓 태어난 새끼는 야생의 세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 일어나 걸음을 떼는 어린 송아지가 그 어떤 것보다 강해 보였다.
어미 소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출산을 알아서 척척 해내고, 천적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출산의 흔적을 지운다. 송아지 역시 눈을 뜨자마자 어미를 알아보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필사적으로 걷는다.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강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쩌면 송아지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저마다의 강함을 부여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어미 소와 송아지는 짚 더미 위로 돌아간 후였다. 그제야 나는 출산과 탄생이란 사투를 벌인 두 모녀가 편안한 휴식을 갖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했다. 아직은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얼마 없는 것 같고, 부모님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게 겁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안의 강함을 믿고 세상 밖으로 걸음을 떼어 보자고.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서툰 걸음을 이어가는 송아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