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by 김율리

이마에 닿는 공기가 참 좋다. 세상이 환하고 찰랑이는 나뭇잎도 한결 생기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건물 유리창에 비친 내 옆모습이 흐뭇하다. 다리가 길고 늘씬해 보인다. 착한 몸종을 둔 덕분이다. 나를 상승하도록 받쳐주는 이 몸종은 저도 유쾌한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또각또각, 경쾌한 리듬의 노래를.

흔히 출세한 사람들을 일러 세상을 눈 아래로 본다고 한다. 높음을 향한 인간 절대욕망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 오르지 않고 그냥 두어도 누구하나 탓할 리 없건마는 한사코 높은 산을 오른다. 높으면 높을수록 더 오르려 한다. 인간의 상승 욕구는 끝이 없다. 이런 인간의 상승욕은 글라이더와 비행기를 만들게 했고 기어코는 하늘의 별을 잡으러 우주로 날아가게 했다. 이쯤 되면 욕망이 아니라 진보와 발전의 동력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하이힐을 좋아한다. 몇 번이나 발목을 접질렸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하이힐을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굽의 높이가 더해가고 있다. 하이힐을 신으면 높아진다. 물론 우주로 날아갈 정도는 못되고 땅으로부터 고작 십 센티 정도 올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상승감은 단순한 치수상의 높이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렇다고 늘 좋을 수만은 없다. 조금 오래 걷노라면 발가락이 부러질 듯 아프고, 발목도 곧잘 삐끗거린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기회비용이다.

얼마 전, 발목을 심하게 접질렀다. 웬만하면 찜질이나 파스 등의 자가치료로 해결을 보지만 이번에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다. 절뚝거리며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인대가 허옇게 부풀어 올라 있다. 진통제를 맞고 깁스를 했다. 치료를 마친 뒤 회를 바른 무거운 발에 삼선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오는데, 의사가 말을 한다. 하이힐은 허리와 무릎, 발목 어디 한군데 도움이 안 되니 이제는 신지 말라고. 나는 슬며시 웃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한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의미란 게 ‘글쎄요, 노력은 해 보겠지만 잘 될는지. 아니,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싫구만요.’ 이다. 짐작컨대 아마 의사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그 역시 직업상 늘 하는 당부를 했을 뿐이고 병원 문을 나서는 저 환자가 높은 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이힐은 중독이다. 독한 마약이다. 한번 그 세계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이 작고 앙증스런 물건은 여자에게 엄청난 시혜를 베푼다. 우선 발의 각도가 높아지면서 종아리의 근육이 확 늘어난다. 발목도 잘록해져서 한결 날렵하게 보인다. 자연스레 힙업도 된다. 게다가 허리가 앞쪽으로 살짝 휘어지면서 가슴을 더 봉긋하게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정면에서 보면 굽의 높이만큼 올라간 발등이 다리의 연장인 듯 기분 좋은 착시도 일으킨다. 여자에게 하이힐은 그야말로 저투자 고효율의 극치다.

이십여 년 전 결혼식 날, 나는 바닥없는 민고무신을 신었다. 신혼여행을 떠날 때도 굽 없는 플랫슈즈를 신었다. 이유는 키다. 평균키를 살짝 넘는 나와, 반대로 평균키 보다 살짝 작은 남편과의 키 차이 때문이었다. 물론 맨발로 서면 당연히 남편이 크지만, 부풀린 머리 위에 베일까지 썼는데 거기다 신부용 하이힐을 신어버리면 키가 역전될 판이다. 물론 질질 끌리는 드레스가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높은 신을 신어 머리 꼭대기가 남편보다 높아지는, 그런 사나운 모양새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신혼 초, 남편을 위해 낮음을 기꺼이 수용했던 내 신발굽이 세월의 두께 만큼 점차로 키를 높여가고 있었으니…. 아이들의 취학기 쯤에는 4~5센티의 미들힐이 되고,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7~8센티의 하이힐로 넘어 가더니 몇 년 전 부터는 10센티 이상의 킬힐로 까지 올라왔다. 나이와 함께 신발굽이 낮아지는 것이 보편적 상황이고 정한 이치인데 나는 어쩌자고 보편과 이치를 역행하는 것일까. 물론 한동안 높아져 온 유행을 따른 것도 있고, 딸들이 신는 높은 신에 자극을 받은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외형적인 것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다. 우물에 빠진 동전 같은, 바닥에 잠겼지만 햇살이 들 때 마다 반짝이는 그 무엇들이 있다. 그건 출산과 노화로 인해 줄어버린 키를 보충하고 싶은 안타까운 욕심이요. 만만찮은 삶을 지탱해 오느라 젊음을 깎아먹고 키까지 깎아 먹은, 그래서 깃 빠진 닭처럼 추레해진 중년의 나, 그런 나를 위로하고 싶은 측은지심 그것이다.

내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이, 신발장 속에서는 종족분쟁이 발발하고 있었다. 인간 세상이 늘 그렇듯 자비심 없는 높은족이 힘없는 낮은족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에 키 작은 종족은 멸족의 위기에 내몰렸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또 다른 곳에서도 밀고 밀리는 상황이 생겨났다. 어찌된 신기함인지 신발굽과 내 목소리가 평행비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신발 위에서 키가 높아지는 것만큼이나 집 안에서의 내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 아닌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건만 설계도가 있는 듯 차근차근, 그리고 공기 흐르듯 자연스럽게.

10센티 신발을 신고 주변을 돌아본다. 남편을 위해 기꺼이 민고무신을 신던 그 보드라운 새색시는 간곳이 없고, 탱자알 같이 단단한 아줌마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역으로 무엇이든 자신의 결정이 곧 법이요, 반듯하고 단호하기가 기왓장 같던 남편은 냉동실에서 내어놓은 떡처럼 말캉해져 가고 있다. 급기야 근자에 들어서는 빙 에둘러서 내 의견을 타진하곤 한다. 차마 들어내어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을 정도까지는 못 내려놓고, 이러저러 하던데 하고 슬그머니 말을 흘리고 간다.

그렇게 말을 흘리고 가는 남편의 짧은 그림자. 어쩌나, 그의 키도 줄어 있다. 긴 세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고군분투하느라 그 역시 키가 줄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의 신발굽은 여전하다. 이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 높이 그대로이다. 오히려 뒤꿈치가 닳아 있다. 뜨끔하다. 나날이 높아만 온 내 신발굽에 가슴이 뜨끔하다.

하지만, 좀 뜨끔하지만, 높은 신 좋아하는 나여! 나를 그대로 두어라. 한줌씩 휘발해버리는 젊음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이라 이해해 주어라. 어차피 환갑이 되고 진갑이 되면 신으라고 축수를 해도 못 신을 것이니 신을 수 있을 때 신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도록 말이다. 어차피 너는 하찮은 미물, 그저 인간이지 않은가. 태고에 신이 인간에게 상승욕구를 심어놨다지만 높아봐야 얼마나 높아지겠으며, 세상을 눈 아래로 봐야 얼마나 보겠는가. 아무렴 하늘의 높이와 경쟁하려 하겠는가. 집 울의 동백꽃과도 키 시샘을 못하는 그저 한낱 인간 아니더냐. 뒷축 닳은 해동떡이 마음에 쓰인다면 그 또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종족분쟁 중인 신발장에 냉엄한 카스트가 더해졌다. 목이 뻣뻣한 장화와 부츠들은 모서리칸 한쪽에서 운신을 못하도록 눕혀진 채 숨 죽여 살고, 운동화와 슬리퍼들은 아래 칸에 모여 앉아 무수리처럼 다소곳이 지낸다. 하이힐은 지체를 고려하여 신발장 속 위치도 높고, 행여 다칠까 공간도 넓다. 외출을 위해 신발장 문을 연다. 눈높이 보다 높은 곳에 뒤꿈치를 바짝 든 하이힐들이 도도하게 코를 튕기고 있다. 눈을 반쯤 내려 뜨고 나를 훑어 내린다. 저런, 주인을 아래로 깔아보는 저 오만방자함…. 한마디 하려는데, 철썩 귓바퀴에 붙는 목소리. ‘나 덕분에 누리는 호사를 감사하시욧!’

그래, 뭐 어떠랴. 때로는 임금도 내시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데…. 방자한 몸종 하나에게 발을 맡기고 현관을 나선다. 행선지는 백화점 신발코너, 남편에게 선물 할 키높이 구두를 사러 갈 참이다. 팔랑팔랑 가볍게 걷는다. 기분 풀린 몸종도 노래를 한다. 또각또각 경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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