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나를 닮은 그들에게.

초예민자로 태어나 세상을 사랑하기까지

by 이너위키InnerWeaki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건 부모님의 집을 방문한 날이었다.

자취를 한 지 4년 차가 다 되어가는 무심하고도, 지나치도록 홀로 서기를 추구하는 딸.

그런 딸이 그리웠던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놀러 올 것을 제안했다.

불쑥 반발감이 들었으나, '폭삭 속았수다'가 끝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애써 착한 딸의 탈을 쓰고 힘을 들여 집으로 향했다.


티비 앞 붙박이인 아빠가 최대치로 높여 놓은 티비소리, 쉴 새 없이 요리하고 청소하는 엄마의 분주함, 일을 그만둔 엄마가 쌓아 놓은 시간, 지루해하는 엄마에게 우울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 온 김에 할머니 댁에 가야 한다는 부모님, 일순간 역전을 당한 경제력의 차이가 불러온 친척의 허세와 부담감, 일치하지 않는 신앙관으로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빠와 벌인 논쟁, 읽고 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것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대목.


나는 어쩐지 무기력했다.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가슴이 물리적으로 죄어 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공허했다.


그저 누군가가 내 인생을 구원해주었으면 하고,

그저 숨을 억지로 끌어 마시며 호흡했다.


침대에 지친 몸을 던지고 가만히 누워 엄습하는 죄책감에 몸을 맡겼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별난 존재일까.

나는 왜 이렇게나 예민한 걸까.

나는 시키는 것을 기쁘게, 아니 억지로라도 수용하며 살 수는 없을까.

사람들과 왜 멀어지려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멀쩡히 삶을 기대하고 살아가는데, 나는 왜 늘 무기력할까.

왜 나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현실을 살지 못하는 걸까.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심리학 유튜브 영상에서 난생처음으로 나를 발견했다.

그날 나는 오열했다.




'초예민자(Highly Sensitive Person)'

'그렇다'가 13개 이상이면 매우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23문항 중 21개에 해당하는 초예민자이다.


1. 나는 주위에 있는 미묘한 것들을 인식하는 것 같다. 그렇다.

2. 다른 사람들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

3. 통증에 매우 민감하다. 아니다.

4. 바쁘게 보낸 날은 침대나 어두운 방 또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로 숨어 들어가 자극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

5. 카페인에 특히 민감하다. 그렇다.

6. 밝은 빛, 강한 냄새, 사이렌 소리 같은 것들에 의해 쉽게 피곤해진다. 그렇다.

7. 풍요롭고 복잡한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

8. 큰 소리에 불편해진다. 그렇다.

9. 미술이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렇다.

10. 양심적이다. 그렇다.

11. 깜짝깜짝 놀란다. 아니다.

12.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야 할 때 당황한다. 그렇다.

13.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않다. 그렇다.

14. 사람들이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짜증이 난다. 그렇다.

15. 실수를 저지르거나 뭔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16. 폭력적인 영화와 TV 장면을 애써 피한다. 그렇다.

17.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 긴장을 한다. 그렇다.

18. 배가 아주 고프면 강한 내부 반응이 일어나면서 주의 집중이 안 되고 기분 또한 저하된다. 그렇다.

19. 생활의 변화에 의해 동요된다. 그렇다.

20. 섬세하고 미묘한 향기, 맛, 소리,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즐긴다. 그렇다.

21. 내 생활을 정돈해서 소란스럽거나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렇다.

22. 경쟁을 해야 한다거나 무슨 일을 할 때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불안하거나 소심해져서 평소보다 훨씬 못한 다. 그렇다.

23. 어렸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내가 민감하거나 숫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에서 최재훈 심리상담가를 알게 된 후,

나는 바로 그의 저서,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무던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예민한 HSP를 위한 심리학>을 구매했고,

오랜 시간을 찾아 방황했던 나의 고통의 이유를 발견했다.

그 사실만으로, 오랜 시간을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저주에서 시달렸던,

베일에 싸인 나라는 사람을 한 꺼풀 벗겨낸 것 같았다.

아는 것만으로 그저 위로가 됐다.




초감각. 초감정. 심미안.

이 세 단어가 초예민자를 여실히 드러내는 형상과도 같다.


청각, 후각, 시각, 미각, 촉각. 그 모든 감각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사람.

타인의 기쁨, 슬픔, 화, 고통, 황홀. 그 모든 감정을 전이해 느끼는 사람.

그림, 영화, 음악, 책. 그 모든 예술을 깊이 경탄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해 내는 사람.


그렇기에 밀려 들어오는 모든 자극들을 매 순간 생생히 느끼고 떠안는,

일생이 고통인 사람.


내가 느끼는 불편과 아픔, 고통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이의 것도 마치 내 것처럼 느끼기에,

타인에게 작은 민폐를 끼치는 것조차 강박처럼 피하는 사람.

타인의 고통마저 내것인양 공황을 느끼는 사람.


작은 죄책감에도 무너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비정한 윤리의 잣대로 나를 끝없이 돌아보는 사람.


초예민자는 왠지 걸핏하면 짜증을 낼 것 같은 불편한 어감과는 달리,

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모든 설명이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젠가 내 인생의 한 조각을 구해냈던 언니가 말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신이 났어. 오늘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잖아."


언니가 부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기분을 존재만으로도 밝히는 법을 알았던 이들은 한결같이 찬란했다.

늘 밝게 웃는 그 해맑음이, 사랑하는 가족들과 모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용기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이해받는 그 솔직함이, 자극을 자극이라 받아들이지 않는 그 무던함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그 믿음이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그들은 나의 자랑이자, 나의 동경, 나의 시기였다.

나는 늘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그들을 보며, 감히 따라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압도였다.

그저 당연하게 알 수 있었다. 직관은 늘 태연히 말했으니까.

그들과 나는 존재 자체가 달라.


나의 기억이 처음 시작하는 유치원 시절부터,

나를 통제하는 법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단 하루도 나의 삶을 온전히 마음 놓고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세상은 예민한 나에게는 온통 자극이 가득한 불구덩이 었다.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내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던지는 무딘 사람들의 말, 행동, 생각, 가치관, 그 모든 것이,

배려와 예의가 없는 그 모든 이기심이 내게로 와서 꽂혔다.

꽂힌 모든 것들을 나는 더 깊이 끌어안았다.

나의 인생은 마치 수백 개, 어쩌면 수만 개의 가시를 하나도 버리지 못한 채 힘껏 끌어안고 살아가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미련한 고난길이었다.


많은 시간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시점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저주에 대한 증명일 뿐이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붙잡는 일이야말로 저주에 얽매이는 것인 줄 알면서도,

마치 나는 애초에 그런 고통을 받도록 설계된 존재처럼,

생의 탄생과 동시에 고통의 구덩이로 걸어 들어갔다. 내 두 발로.


늘 내 머릿속엔,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수백 개쯤 머릿속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나는 늘 혼자 동굴에 틀어 박혀 지친 몸을 널브러트린 채 숨을 고르기 바빴다.




이처럼 남의 감정 잘 헤아릴 줄 알고,

죄짓는 일에 질색하며,

양심적인 데다 책임감까지 투철한 사람들.

남들보다 심적인 고통을 몇 배는 더 느끼기에 아프지 않으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깨지기 쉬운 당신.

매우 예민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까지 민감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예민하다는 말이 지닌 부정적 뉘앙스와는 다르게

사실은 이들이 굉장한 팀플레이어임을 세상이 더 많이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최재훈 지음 -




나는 아직도, 그 누구에게도,

오직 신과 종이를 제외하고는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털어놓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반경이 넓어진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나를 이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억지 호흡으로 나를 진정시켜야 할 때가 있고,

누구도 나를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하고 아늑한 자연 속에서 울타리를 치고 싶고,

여전히 인생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꽤나 자주 엄습한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품은 이상과 아직은 꾹꾹 눌러 담아야 하는 말들을,

나는 결코 온전히 무시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버텨야 한다는 것 또한.


그래서 작게나마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호흡하기 위해,

기다림이 너무 지루하지 않게,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또 다른 나를 위하여.

아직도 자신을 알지 못해 죽음을 곱씹을 그들에게.


당신들이 조금이나마 짐을 내려놓고 숨을 틔우며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나아가 당신들이 끔찍이도 버리고 싶은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사랑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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