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시간

얼굴 없는 여자

by 가가루

2020.3.12


또 꽃을 찍었다.

자꾸 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흰색 물건만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언제까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흰색 샴푸, 트리트먼트, 얼굴 크림, 립스틱.

그 뒤에 두 개는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향초랑 비누였던 것 같기도 하다.


겉은 흰색인데

안에 내용물도 흰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향초는 한동안 저녁마다 조금씩 켰다)


마트에 가서 (집 앞 10분 거리)

야채를 사왔다.


장바구니에는

무, 노랑과 빨강 파프리카 파파야

그리고 무언가가 더 있었다.



우연히 예뻐서 찍었는데

그걸 남겨두는 게 좋다.


사진으로 담는 일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날 내 눈에 보인 이쁜것을 누군가도

이쁘다고 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는듯 싶다.



2020.3.14


집에만 많이 있는 시간은

치앙마이에서 시작된 것 같다.


코로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전부터 나는 집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무는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쓴다.


물건을 하나씩 고르고

그 물건이 공간 안에서 쓰이면서

우연히 어떤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게 눈에 보인다.

그 순간을 포착한다.


사진은 그렇게 쌓인다.

내 핸드폰 카메라 안에.


방에 누워 있다.

오전 9시, 커튼을 치고



2020.3.17


베란다에서 그림을 찍었다.


얼굴 없는 단발 여자를 그렸다.

그 위에 펄을 얹었다.

뿌렸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단발 여자들.


빨간 사과와 요거트를 간식으로 먹었다.


또 다른 여자를 그리려고

거실에 물감을 꺼내놓고 앉았다.

그리지는 않았다. 아직.

빈 캔버스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물감들이 있다.


그리고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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