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에 대한 대답을 찾아서.
어느 날 영상에서 누군가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에 법륜스님이 대답하시길,
"그저 태어났으니 사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앞으로는 왜? 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세요. “
영상을 본 후에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항상 이유가 있든, 이유를 찾든, 목적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태어났으니 사는 것’은 다소 맹목적 느낌이라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하니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미완성은 삶의 동력.
외부에서 듣는 삶의 이유가 아닌 스스로 고민을 해보자.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한 대답은 삶이 미완성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완성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위해, 완벽한 완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의 완성'을 위해 느리게 걷기도, 빠르게 뛰기도 한다. 그 완성의 대상이 자신의 커리어 일 수 있고, 본능적 욕구를 반영한 의식주에 대한 추구일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사랑이 될 수 있다. 완성되지 않은 무엇인가는 마음을, 몸을, 생각을 움직이게 한다. 배가 고프니 식욕이 생겨 식사를 하고, 얻지 못한 상대의 마음문을 열기 위해 지극히 노력하고,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 이렇듯 미완성에서 삶의 동력을 얻는다.
여백의 그림을 사랑해.
여백의 미는 미완성이 아니다. 한자 그대로 ‘여백의 美’다. 언제부터인지 도화지 위로 빽빽하게 채워진 화려한 그림보다 사색과 감상의 공간을 마음껏 허락하는 듯한 여백에서 멋스러움을 느낀다. 나에게 미완성은 공간의 여백과도 같다. 좋은 책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읽는 완성의 순간도 짜릿하지만, 잠시 여운을 남기며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장을 덮어 버리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움으로 마무리하는 것. 가끔은 이러한 고의적 미완성의 행동들이 미루었던 그 시간만큼 설렘을 배로 선물하기도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 예전에는 와닿지 않았던 그 말이, 이제 조금은 마음에 닿는다. 매일 결론 맺지 않은 나의 노력들이 아름다운 요즘이다.
未완성의 美완성을 위해
아쉽지만 이 글도 여기까지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