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엔 없고 위스키엔 있는 것

본격 위스키 권장 에세이

by 가하


나는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이 주는 흥취를 꽤 즐기는 편이다. 대학생 때는 동아리 사람들과 '주酒르마블' 등의 술 먹기 게임을 즐겼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꼭 막차까지 남아 술자리를 즐기곤 했다. 평소에는 조금 조용한 성격이지만, 술 한잔을 걸치면 쾌활해지기 때문에 내게 있어 술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다. 평소에는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서로 나누면서, 조금 더 가까워지는 그런 시간들이 좋았다. 그래서 술자리가 있다고 하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는데, 얼핏 보면 애주가의 면모를 갖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술 '자리'가 좋았던 것뿐이지, '술' 자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 술은 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술'이라고 하면 한국인은 누구나 초록병의 그 '소주'를 떠올릴 텐데, [쏘주]라고 발음해야 입에 더 착 감기는 그 녀석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맛이 없었다. 무색무취에다가 쓰고 역한 맛. 술자리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소주는 너무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해봐도, '소주를 맛있자고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냐, 소주는 써야 제맛이다'는 식의 반응만 돌아왔다. 또 한국의 술자리 문화에서는 부어라 마셔라 하며,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고, 소주잔을 부딪히며 원샷을 외쳐대야 흥이 살아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주만 마셔댔던 것이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나는 절대로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아니,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서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삼십대 초반, 직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외로운 타지 생활을 하던 나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가끔씩 술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같이 술 한잔 할 마음 맞는 동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또 술 한 잔 하자고 늦은 저녁 시간에 친구를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용기를 내어 친구를 불러낸다 해도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 장소, 비용 등이 문제였다. 그냥 집에서 혼자 간단히 털어 넣고, 적당한 취기에 헤롱 대다가 푹 자고 일어나 출근을 하는 쪽이, 직장인의 음주생활에 적합한 형태였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른바 '홈술', '혼맥'이다. 맥주는 소주와는 달리 내 입맛에 너무나도 '맛있는' 술이었는데, 퇴근 후나 약속이 없는 주말, 집에서 혼자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감자칩과 함께 홀짝이는 맥주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이슬 맺힌 차가운 캔의 촉감, 뚜껑을 딸 때의 그 상쾌한 소리, 부드러운 맥주 거품의 목 넘김과 짜릿한 탄산의 느낌까지! 그런 시원한 감각들로 사회생활의 팍팍함을 잠시나마 날려버릴 수 있었다.


코로나 이전의 오산시 '야맥 축제'에서 맛 본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제품. 이제는 대형 마트에서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며 마시는 소주의 세계에서, 혼자 조용히 즐기는 맥주의 세계로 이동했고, 때마침 코로나 19가 확산되며 회식이건 친목모임이건 술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요즘은 더더욱 '소주'를 마실 일이 없어졌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이유들로 한동안 맥주를 즐기긴 했지만, 맥주도 내게 있어 완벽한 술은 아니었다. 맥주는 발효주에 해당하기 때문에, 증류주인 소주보다는 숙취가 심했다. 또 맥주는 거품이 주는 풍미가 매력의 절반 정도는 차지한고 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맥주 거품은 따라놓으면 금방 꺼지고, 빠른 시간 내에 마시지 않으면 탄산도 빠지고 미지근해져서 금세 밍밍해진다. 게다가 맥주는 금방 배가 불러지고, 활발한 이뇨작용 때문에 화장실도 자주 가고 싶어 지므로, 내게 있어 약간의 한계가 느껴지는 아쉬운 술이었다.


그래서 막걸리나 와인 등 이런저런 술을 기웃거리며 마셔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둘 다 맥주와 같은 발효주이기 때문에 다음 날 숙취가 엄청나며, 와인 같은 경우는 한 병 따면 다 마시지 못해 보관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래, 역시 나는 술을 좋아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구나, 몸에도 안 좋은데 이 참에 끊어볼까?' 하던 찰나에 '위스키 whiskey'가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스키의 대명사인 '더 글렌리벳 12년'(미니어처)


위스키? 그 독하고, 아저씨들이 음험한 단란주점에서 돈 자랑하면서 마셔대는 그 술? 혹은 외국 영화에서 멋진 신사들이 위기의 순간에도 여유를 부리며 한 모금 젠틀하게 들이켜는 그 고급술? 아마 독자분들은 이 두 가지 이미지 중에서 한 가지는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뭔가 고급스러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중후함이 느껴지던 그 술에 대해, 이제 나는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술을 찬양하기 위한 글까지 쓰고 있는 신세이다. 하지만 위스키가 가진 매력은 그만큼 강력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라는 위스키 성지 여행기까지 냈을 정도라면, 한 번 호기심 정도는 가져볼 만하지 않겠는가? 위스키가 가진 매력, 이 한 편의 글로 다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도 대표적인 매력 딱 두 가지만 꼽자면 바로 '다양성과 여유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혹시 전 세계 판매량 1위의 증류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바로 한국 소주 '참이슬'이다. 영국 주류 전문지 '드링크스 인터내셔널'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참이슬은 2001년 처음 1위에 오른 후 16년 연속으로 차트 1위를 차지했는데, 2위는 인도 위스키 ‘오피서스 초이스(Officer’s Choice)’로, 판매량이 참이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회식이나 신고식 등 우리나라 특유의 술 강요 문화 때문이겠거니 하며 헛웃음을 쳤었다. 하지만 '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요즘,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한국인이 특별히 술을 많이 마신다거나 남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실 수 있는 술이 오로지 '소주'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고깃집이나 일반 식당은 물론이고 술집에 가도 주문하는 술은 늘상 소주 아니면 맥주, 막걸리가 전부이다. 게다가 각 주종별로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라 '참이슬'아니면 '처음처럼'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맛집은 여기저기 까다롭게 찾아다니면서, 그 음식에 곁들이는 술은 왜 오로지 '소주'여야 하는 것일까?

대형 마트의 소주 코너. 똑같은 제품들을 반복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물론 요즘에는 소주도 점차 다양한 브랜드와 라인을 개발하고 있다. 과일맛 소주도 선보이고 있고, 복고 트렌드를 타고 옛 추억의 '진로'를 깔끔한 디자인과 맛으로 새롭게 출시하여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요즘엔 메로나 소주, 아이셔에 이슬 소주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소주 브랜드는 지역별 대표 소주 10개 내외로 매우 한정적이다. 또한 소주의 달인들은 지역별 소주의 맛을 잘 감별하며 취향껏 마신다고는 하지만, 일반인(=필자)에게는 그냥 다 '쓴맛'일뿐이다.


나는 그래서 증류주 세계 최다 판매량 '참이슬'이란 결과가 별로 달갑지 않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다양한 술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소주에 비해 위스키는 생산국부터 다양하다. 위스키의 원조국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의 아이리시 위스키에서부터, 스코틀랜드의 스카치위스키와 피트 위스키, 미국의 버번위스키, 캐나다의 라이 위스키 등 각 나라별 제조 방식에 따라 개성 있는 위스키들이 출시되고 있으며, 후발 주자인 일본, 대만, 인도 등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위스키를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나라별 증류소마다 고유한 전통과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위스키 애호가들은 증류소 투어나 팝업 스토어 등 다양한 문화적 체험도 즐길 수 있다.

주류 전문점 '와인 앤 모어'의 위스키 코너. 가지각색의 병 디자인을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다음으로, 위스키가 가진 두 번째 매력을 꼽자면 바로 '여유로움'이다. 여러분은 혹시 소주[쏘주]가 지닌 맛을 음미하기 위해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끊어 마시는 행위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대부분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며 꿀꺽, 삼켰는가? 전통 방식의 증류식 소주가 아닌, 공장에서 기계처럼 찍어내는 희석식 소주를 음미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소주는 원래 '쌀'을 원료로 하여 오랜 시간 정성스레 빚어내는 '증류주'(=스피릿, Spirit)였다. '안동 소주, 문배주, 이강주, 감홍로' 등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1965년, 경제적 궁핍의 시기에 박정희 정권은 '양곡관리법'을 통해 아예 쌀로 술을 빚는 행위를 금지시켜버렸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소주 생산을 위해 쌀이 아닌 '주정(酒精)'이란 것을 사용했는데, 주정의 원료는 놀랍게도 '타피오카'이다. 버블티에 들어가는 이 이름도 생소한 타피오카는 남미 지역의 '카사바'라는 식물로 만든 것이다. 이 타피오카로 만든 주정에 물을 섞어 '희석'하고, 스테비아, 에리스리톨 등의 합성감미료를 넣어 단 맛을 준 것이 바로 우리가 늘 마셔온 '희석식 소주'이다. 우리가 느껴온 그 소주의 은은한 단맛은, 사실 쌀의 단맛이 아닌 합성 감미료의 맛이었던 것이다!

쌀이 없어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60~70년대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하더라도,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도 소주는 한국 원래의 전통대로 돌아가지 못했고,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쓰디쓴 술, 삶의 애환이 담긴 서민의 술'이란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다.


만약, 한국 경제 상황이 나아진 후에 전통 소주를 부활시켜 현대화하고 다양하게 개발 보급했다면, 어쩌면 술을 음미하며 마시는 회식 문화가 조성될 수도 있었을까?


그랬다면 꼰대 상사들은


"아, 원샷하지 말고 끊어서 마시라니까? 소주[소:주]는 이 맛과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는 술이라구!"


이런 행복한 잔소리를 해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일품 진로, 화요'등 전통 방식의 증류식 소주가 출시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언젠간 참이슬이 아닌 전통 증류식 소주가 차트 1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 그리고, 2017년부터는 전통주에 한해 온라인 판매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집에서도 진짜 증류식 소주를 손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알콜이 코를 쿡 찌르고 맛은 쓰기만 한 희석식 소주와 달리, 위스키는 맛과 향이 좋고, 도수는 최소 40도 이상이기 때문에 천천히 음미하며 여유롭게 마시기에 좋은 술이다. 미지근하면 더욱 역해지는 소주처럼 차갑게 해서 마실 필요도 없고, 맥주처럼 금세 김이 빠질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코르크 마개를 한 번 오픈하면, 보관이 어려워 그날 한 병을 다 비워야 하는 와인처럼 억지로 많은 양을 마실 필요도 없다. (와인 한 병을 무리해서 다 비운 다음날에 찾아오는 그 숙취란! 차라리 술을 끊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말?)


결국, 내가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맛과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술! 이것이 바로 위스키가 가진 매력의 한 줄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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