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5년 봄, 오리서원의 강연장
봄볕이 서원의 기와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리서원의 검은 기와는 갓 구워낸 묵처럼 반들거렸고, 담장 너머 대나무들은 선비의 기개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살짝 흐릿하게 물들였지만, 공직자들에게 이 풍경은 소풍 같은 해방감을 주었다.
강단에 선 나는 청중을 훑어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오늘 날씨가 좋지요? 사무실 밖에서 숨 쉬는 게 중요합니다.”
웃음이 터지자, “옆 사람을 위해 박수 한 번 쳐보세요. 이번엔 손등으로!” 청중이 따라 하며 강당이 활기찼다.“
우리는 관행처럼 손바닥만 치지만, 가끔 손등 박수가 필요합니다. 오늘 만날 이원익 대감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중력을 거스른 역행자죠.”
나는 화면을 넘겨 지금의 반듯한 서원 풍경과는 사뭇 다른, 비바람에 깎인 낡은 초가 그림을 띄웠다.
“지금 보시는 이 오리서원은 후손들이 정성껏 가꾸어 저렇게 윤이 나지만, 400년 전 영의정 이원익의 집은 어떠했을까요? 40년 정승의 집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비가 새는 두 칸 초가였습니다. 저 반들거리는 오리서원의 기와 아래 숨겨진 진짜 이야기는 바로 그 초라한 초가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화이트보드에 굵은 글씨로 [中力 逆行者]라고 적었다.
“이 명함을 제가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 땅으로 떨어집니다. 중력이지요. 권력의 중력, 돈의 중력, 관습의 중력…. 세상의 모든 것은 아래로 흐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씨앗은 그 중력을 거슬러 흙을 뚫고 위로 솟구칩니다. 죽은 것은 중력을 따르지만, 살아있는 것은 중력을 거스릅니다. 이원익은, 그 지독한 중력의 시대에 홀로 꼿꼿이 서 있던 역행자였습니다.”
나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분위기는 이내 엄숙해졌다. 나는 쉰세 번째 생일에 딸 아영이에게 받은 메시지를 띄웠다.
[아빠가 평생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저도 열심히 사는 어른이 됐어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5. 큰딸 아영]
“제 큰딸 아영이가 보내준 글입니다. 쉰셋에 받은 이 문장이 저에게는 그 어떤 훈장보다 무거웠습니다. '나를 닮아 열심히 살게 되었다'는 말. 제가 80세가 되었을 때, 제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도 이런 기억이 남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퇴직할 때 어떤 공직자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강당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연수생들의 숨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그 침묵의 무게를 응시하며 스크린 속 오리 대감의 초상을 가리켰다.
“자, 이제 그 위대한 역행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그의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2. 1634년, 장마의 한복판
시점이 뒤틀리며 현대의 깨끗한 기와지붕이 물결치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눅눅한 흙먼지와 지독한 빗소리였다.
1634년의 광명. 400년 뒤에 세워질 반듯한 서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하동 산자락 밑에는 영의정 이원익의 처소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와 한 장 얹지 못한 초가지붕은 빗물을 머금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고, 처마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는 이미 방 안까지 침범해 돗자리를 적시고 있었다.
그 방안에, 여든넷의 노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방 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다란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삿갓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무릎 위에 놓인 서책 위에 떨어졌다.
“대감, 방 안에서 삿갓이라니요…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달려온 하인이 방 안의 풍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조선의 세 명의 왕을 모시고 여섯 번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앉았던 이 나라 최고의 어른이 비 새는 방에서 삿갓에 의지해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원익은 붓을 놓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방이 삿갓만도 못하니 삿갓을 쓰는 것뿐이다. 내 몸이 백성의 지붕만도 못한데, 비 좀 맞는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희미했으나, 그 안에 담긴 사유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삿갓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그가 읽던 서책 위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빗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신음이었고, 무너져가는 나라의 실핏줄이었다.
그는 지금 종이 위의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84년 생애 동안 제 몸에 새겨진 조선의 흉터를 읽고 있었다. 왕실의 종친으로 태어났으나 권력의 단물 대신 청빈을 택했던 고집, 임진왜란의 포화 속에서 이순신을 지켜냈던 강직함,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공납의 폐단을 끊기 위해 지주들과 싸웠던 대동법의 기억들….
노신은 눈을 감았다. 삿갓 위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거문고의 낮은 현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기억의 강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오동나무 마을의 어린 시절부터, 처음으로 나라를 맑게 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던 그 서늘했던 새벽까지.
이제, 중력을 거부하고 솟구쳤던 그 위대한 역행자의 긴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