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하루다
상하 관계가 그닥 존재하지 않는 미국 회사 문화지만, 그래도 매니저 앞에서는 항상 긴장을 한다. 푸근한 진짜 매니저 A가 있는가 하면, 장난기 하나 없는 매니저 B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B 매니저는 내 직속 매니저는 아니다. 그렇지만 한창 내 매니저가 공백이었던 시절, 1년 정도 내 매니저 역할을 했어서 아직까지도 같이 하는 프로젝트가 많다. 그래서 B 매니저랑 같이 일할 때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 매니저는 나에게는 무섭다. 웃는 걸 1년에 세 번 정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제작년쯤, 단체 미팅만 있으면 내가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던 시절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니 그냥 멍 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표자가 내 이름을 언급하며
"00이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한 거다. 어차피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발표를 안 듣고 랩탑으로 내 일 하던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급하게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걸 지켜보던 매니저가 장난으로
"본인 이름 나오니까 갑자기 집중하네"
라고 했다. 모두가 웃었고, 나도 당황했지만 그냥 따라 웃었다. 근데 사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장난 같긴 했지만 혹시 진심이면 어떡하지, 나 찍히는 건가... 이런 걱정이 스쳤고, 그 이후로는 단체 미팅이라도 좀 더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신입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저 사람도 그냥 나보다 경험이 10년 정도 많은 개발자일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몇 년간 하다 보니 이제는 좀 무뎌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이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한다. 몇 개월 전 회사 Happy hour 때 나는 다른 사람이랑 수다 떨고 있는데 우리를 지나치면서 피클볼 치자고 할 때 속으로는 기겁하면서 겉으로는 가볍게 거절했다. 같이 피클볼을 칠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정말로 한 번도 피클볼 쳐본 적 없기도 하고.
무섭다고 해서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존중한다. 같이 일한 3년 동안 원래 그 매니저 밑에는 5명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15명쯤 되려나. 실력도 인정받고, 다른 매니저들이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서 팀이 합쳐지기도 하면서 팀이 커졌다. 그래서 요즘은 미팅에서 얼굴 보기도 힘들다.
이 매니저는 미팅을 참 많이 잡는다. 이 사람이랑 프로젝트 두 개만 겹쳐도 미팅이 우수수 잡힌다. 그것도 웬만하면 아침 일찍으로. 어디서 배운 managing 스타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짜증 나도 일을 하게 만드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다. 다른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매일 프로그레스 미팅에서 무언가 말을 해야 하니, 결국 매일 그 프로젝트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더 짜증 나는 건, 본인이 잡아놓은 미팅에 본인이 거의 반은 빠진다는 거다! 나는 혹시라도 드물게 나타나는 이 매니저가 하필 내가 빠진 날 등장할까 봐 매일 참석하는데!
아무튼 오늘 이 매니저에게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 오늘도 회사 출근하기 너~~무 싫었는데, 오자마자 오랜만에 미팅에 나타나서는 내가 그동안 한 프로그레스를 듣더니
"오, 이거 진짜야? 어떻게 한 건데? 잘했는데?"
라고 해줬다. 오늘 하루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칭찬받는 건 좋다. 솔직히 이런 사람한테 칭찬받으면 더 좋다. 다음 주가 연휴라 이번 주는 급한 일 아니면 대충 넘어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일할 의지가 생긴다. 프로그레스가 좋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달라고도 했다.
이러저러하게 짜증난다고 적었지만, 나는 이 매니저를 정말 존경한다. 일을 잘하니 싫어할 수가 없고, 개발자 출신이라 아는 것도 많고, 끊임없이 배우고, 남들에게 기대하는 만큼 본인은 더 열심히 하는 게 보인다. 그러니까 금방 높은 자리로 올라간 거겠지. 사람을 잘 다루는... 그런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다.
다음에는 기회 되면 피클볼 같이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