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왜 시를 쓰려고 하는 걸까?

by 김가인 오로시


어제는 삼청동 전시 반입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준비를 했다.

그림을 옮기고, 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작가님들을 뵙는 자리까지.



몸은 분주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묘하게 차분했다.



새로운 공간에 그림을 내어놓는다는 것,

그 순간의 공기는 언제나 긴장과 기쁨을 동시에 품게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맴돈 질문이 있었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고, 왜 시를 쓰려고 하는 걸까?”




기록에 대한 본능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오래 붙잡고 있었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그저 내가 좋아서였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니,

단순한 ‘좋음’만은 아니었다.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이든 글이든, 나의 하루와 내 마음,

내가 지나가는 시간을 남기는 일에

집착에 가까운 애착이 있다.



그건 결국 “나 여기 있었다”라는

신호를 남기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이 기록의 욕구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내 존재의 증거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러니 그림도, 시도

결국 같은 자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전시의 의미


그렇다면 나는 왜 전시를 해야 하는 걸까?

답은 단순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이 꼭 갤러리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갤러리는 물론 좋다.

공간이 주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통로는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내가 의미 있다고 믿는 일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



그것도 충분히 전시이고, 소통이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과의 깊은 만남이었다.


어제 삼청동에서의 경험은 그걸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내가 가진 도구들


돌아보면 나는

사진과 디자인 일을 오래 해왔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결국 순간을 붙잡는 일이고,


디자인을 한다는 건

세상을 정리하고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이 기술들은 내게 도구이자 무기였다.



이제는 그 무기들을 그림과 시라는 내 언어와 엮어낼 수 있다.


그림은 나의 감정을 담아내는 방식이고,

시는 나의 생각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사진과 디자인으로 다져온 시선은

그 언어들을 더 단단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을 준비해왔는지도 모른다.



더 뚜렷해진 방향


어제 하루가 준 가장 큰 선물은 방향의 확신이었다.



나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 기록은 그림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갤러리 전시도 좋다.

하지만 그것만이 길은 아니다.


온라인이든, 작은 모임이든,

심지어 한 권의 책이든 —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중요한 건 내가 멈추지 않고 기록을 이어가는 일이다.



오늘의 다짐

삼청동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깨달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은 거창하지 않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루를 기록하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남기고,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내 이름은 자연스럽게 남을 것이다.



“나 여기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그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이유다.

오늘도 다시, 나의 기록을 이어간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기록자이고,

나눔을 꿈꾸는 예술가다.


그 길 위에서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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