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인 에세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이 내 안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건,
다름 아닌 한 권의 소설 때문이었다.
요즘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읽으며,
‘내게 처음 충격을 안겨준 책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간 책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였다.
고2 시절,
나는 처음으로 그 책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끝까지 다 읽었던,
학교에서 추천도서도 아닌 그냥 책을 산건
아마 처음이었던,
그렇게 기억에 남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책임감 있게
책을 읽는 습관이 없었다.
대개는 중간쯤 덮고,
흥미가 떨어지면 쉽게 포기하곤 했다.
그런데 《향수》는 달랐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 기괴하고 강렬한 세계에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나도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자각이었다. 단순한 독서 경험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던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
머릿속은 폭풍 같았다.
하지만 그 폭풍이 정확히 무엇인지,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순히 기괴한 살인 장면 때문도,
그루누이가 만든 향수의 묘사 때문도 아니었다.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라는
알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 혼란은 마치 실타래처럼
마음속에 엉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실타래는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데,
오히려 그게 《향수》라는 소설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결말은 너무나 허무하다.
완벽한 향수를 완성한 순간,
그루누이는 삶의 의미를 잃고
군중 속에서 산 채로 잡아먹힌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성취를 이루어도,
결국 남는 건 공허와 죽음뿐이라는 메시지.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떻게 살아도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었다.
이 질문이
내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화두로 존재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향수》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나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져준 첫 번째 책이었다.
채사장이 《죄와 벌》이
죄와 속죄를 묻는 고전이고 첫 책이었다면,
《향수》는 욕망과 인간성,
그리고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그루누이는 향기를 쫓다가
인간성을 잃었고,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반대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기록 습관과
예술 작업으로 이어졌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고2의 내가 그 책을 덮으며 느낀 충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나는 예술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여전히 반복한다.
《향수》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나를 사로잡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선명해진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내 앞의 하루를
더 진지하게 만든다.
그루누이가 잃었던 건
인간적인 연결이었지만,
내가 지켜내고 싶은 건
그 연결 속에서 피어나는
평범한 순간들이다.
따뜻한 집 안 공기,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
손끝에 남은 온기.
그런 사소한 장면들이야말로
잘 죽기 위해 반드시
잘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나는 이제 고2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느낀 그 폭풍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은 죽음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같은 말을 건넨다.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로 그 질문이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향수》가 내게 남긴 건 허무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사랑을 기록한다.
잘 살기 위해, 잘 죽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