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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 Nov 15. 2019

<단순한 진심> 전가하기로 기억의재구성 해내기의 힘

이름의 의미가 갖는 의미


<단순한 진심>엔 주인공 문주(나나)가 이름의 의미에 대해 묻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자신을 구해 준 기관사가 지어준 '문주'라는 이름의 뜻으로부터 시작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의 뜻을 묻는다. 공항의 입국장 벤치에서부터 만나는 사람의 이름의 뜻을 문주는 알고 싶어 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문주는 그걸 찾는 중이어서 일까? 소설을 읽다가 내가 글쓰기 공부하러 매주 갔던 '합정'의 뜻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합정은 조개 우물이라는 뜻인데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 칼을 갈고 씻기 위해 판 우물이라고 한다. 거기에 양화진 선교사 기념 공원이 있다. 옛날에는 천주교 신자가 박해를 받던 곳이었구나. 1년이나 지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 신기하고 슬펐다. 합정은 문주가 프랑스에서부터 만나러 온 서영이 일하는 곳이자 작업실 역할을 하는 커피숍이 있는 곳이다.


문주가 '마지막 판돈을 거는 마음'으로 응한 인터뷰를 읽고 다큐 영화 제작을 구상한 서영이 문주에게 연락을 해온다. '정체성, 존재감, 집, 예의' 그런 단어들에 끌려 다시 오지 않으리라던 한국으로 문주는 아이를 임신한 채 귀국한다. '단 한순간도 우주(아이 이름)에게 암흑 따위를 상상하게 하지 않을 터'라고 결심하면서.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나는 암흑에서 왔다'이다.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 자신의 뿌리와 과거에 대해 암흑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암울함. 내가 품은 생명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절실함이 애틋했다.

문주가 만났으나 이름을 묻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있다. 노파이다. 그녀는 '생명'을 지켜내지 않은 자이다. 그가 너무도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므로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지만 문주는 차갑게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문주로서는 당연하다.

문주는 서영네 집에 지내면서 우연히 1층 <복희식당> 주인 할머니의 밥을 세 번 사 먹게 된다. 그러고 말 수도 있었지만 우주의 이끌림일까?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혼혈 아이를 생모와 같이 1년 간 키우다가 해외로 입양 보내게 된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고 점점 더 그들의 사연에 빠져든다. 할머니의 간절한 편지를 받던 복희가 드디어 한국에 오게 되고, 그의 귀국 전 생모의 무덤에 가보고 싶어 하는 복희의 소원을 이뤄주려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러다가 연희와 복순에게서 한 글자씩 가져와 '복희'라는 이름을 지었음을 알아차린다. 이름에 따뜻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내 이름의 뜻을 새삼 되짚어본다. 내 이름은 처음엔 최지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집도 지현, 뒷집도 지현이어서. 가진으로 바꿨다고 들었다. 어릴 때 나는 내 이름이 싫었다. '가짜, 가방, 가오리, 초가집' 등. 어릴 때의 아이들은 그 사람의 특징보다는 이름의 음을 가지고 별명을 많이 짓는다. '가~'로 시작하는 글자는 많았고 나의 고유함에 대해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은 무색무취의 별명들이 난 싫었던 거 같다. 커가면서 나는 내 이름이 좋아졌다. 흔하지 않았고 부르기 예쁘고 성별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움도 있으면서 뜻도 맘에 들었다. 아름다울 가, 참될 진. 아름답고 참되다. 마음이든 얼굴이든 아름답다는 건 좋다. 진실함, 참됨도 좋다. 이렇게 이름은 지은 것은 아빠가 한 일중에 가장 맘에 든다.



'전가하기'와 '기억의 재구성'



문주는 '전가하기'를 습관으로 가졌다. 주로 외로움을 전가하는 일이 많았는데 '어떤 상황을 무대처럼 만들어 상상으로 빚어낸 배우에게 내게 닥친 외로움을 전가하는 것이다. 전가하기는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기에 깊이 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는 말이 좋았다. '전가한다'는 단어를 선택하면서 은근한 자기비판을 깔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무척 성실하고 자기에게 엄격한 사람일 수도 있고, 풍자나 관점 전환에 탁월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습관은 멋진 것이다. 외로워하는 나를 보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 객관화가 된다. 그게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출발이기도 하고 희망의 복선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전가하기 습관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자신이 버려진 곳이 철로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린 문주가 철로 저편으로 걸어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금씩 멀어져 가던 문주의 뒷모습이 내 시야가 닿는 가장 먼 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을 때, 나는 그녀가 철로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다시는 이 공간에 있는 모습으로 상상되지 않으리란 걸 예감했다. 그토록 긴 세월 나의 정체성인 동시에 고통이 은닉된 장소이기도 했던 철로는 이제 더 이상 나를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철로가 불확실해지자, 순진하게 악하다는 생모에 대한 단정도 무의미해졌다. (198쪽-199쪽)


문주가 자신이 버려진 곳을 '철로'라고 확신했다가 서영의 질문으로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장면이다. 내가 뽑은 작품 속 명장면이다.


문주는 '자기 연민에 침잠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마음 상태를 사랑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이 '이제는 연민하는 자기 마음을, 그때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노라는 신호'로 읽혔다. 반가웠다. 과거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기억의 재구성'이 꼭 필요하다. 기억의 재구성은 무의미를 위한 작업이다. 무의미함은 자신을 구성했던, 자기의 일부와도 같았던, 한 때 살아가는 힘으로 쓰였을 '고통'을 폐기 처분하는 일이다. 얻는 것은 자유다. 나는 한상담 집단상담의 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도 친부나 형제에게 강간당한 기억도, 어린 시절 의무를 강요받았던 기억도, 한번도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도 선택적 기억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변화의 순간이고 행복의 시작임을 목격했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장면을 본 것 같아서 기쁘다. 실제로 문주가 서영과 옛 기지촌을 다녀온 날 복통이 와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통증과 피곤은 철로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문주는 철로가 '생모를 미워하기 위해 구축한 관념의 공간'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작품 말미에서 어린 문주를 버린 곳은 철로가 아니라 역대합실임이 밝혀지지만 그때 그건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문주는 스스로 재구성한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으므로.


작품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보호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린 문주를 발견한 곳을 무심히 알려주는 대사, 복희가 브뤼셀에 돌아가 보내온 편지, 문주 이름의 의미에 대한 정보를 주는 대사의 다정함에서 더욱 그랬다. 찬바람 들까 옷깃을 꼭꼭 여며주어야만 안심하는 사람의 손길이다. 정도 많고 마음 약한 꼼꼼한 사람의 것이다. 작가 조해진의 것일까.



https://blog.naver.com/gajin91/22170842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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